1999년 미전국의 연설학 교수 137명의 평가를 종합한 20세기 100대 베스트 정치연설 명단이 발표되었다. 존 F. 케네디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저명한 취임연설들을 제치고 최고의 영예를 차지한 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 인종갈등으로 찢겨져 피 흘리던 1960년대 미국과 미국민의 가슴 속에 울려 퍼졌던 화합과 희망의 메시지였다.
처음부터 ‘역사적인’ 것은 아니었다. 작성된 연설문은 훌륭한 내용이었지만 ‘미국의 진로를 바꿀 만큼’은 아니었다고 한다. 타임과 USA투데이가 최근 발간한 ‘워싱턴 행진’ 50주년 특집은 ‘꿈 연설’에 얽힌 뒷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다.
1963년 8월28일, 대규모 민권시위가 열리던 수요일 아침, 워싱턴 DC는 초긴장 상태였다. 많은 상가는 문을 닫았고, 시 외곽에는 수천명 군대가 전투복장으로 대기 중이었으며, 폭동발생 우려에 진보신문 뉴욕타임스조차 취재진을 전세 낸 헬리콥터에 태워 파견했다. 백악관도 필요한 경우 케네디 대통령이 즉시 서명할 수 있도록 계엄령 선포문을 작성해놓고 있었다.
그렇게 당시는 테러불안과 인종갈등이 들끓던 혼란의 시기였다.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고 경찰견을 풀어놓은 앨라배마 버밍햄 경찰의 잔인한 진압이 자행되었던 그해 여름 미국에선 1,122번의 민권시위가 열렸고 2만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베트남에 종군 중이던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그 추악한 8월에 8천마일 밖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던 나를 대신해 버밍햄의 우리집에선 장인이 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경비를 서야했다”고 기억한다.
무더워 더욱 뜨거웠던 그날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의 종착지인 워싱턴 내셔널 몰 링컨 기념관 앞은 전국에서 모여든 25만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80%는 흑인이었으나 20%는 말론 브란도, 폴 뉴먼, 찰턴 헤스턴 등 할리웃 스타들을 포함한 백인이었다. 수백마일을 걸어온 가난한 촌부들까지 일요일 교회 가듯 단정한 차림새였다. ‘가스펠의 여왕’ 마할리아 잭슨의 흑인영가가 멀리 연방의사당까지 울려 퍼졌고, 밥 딜란은 민권운동가 살해사건을 담은 ‘초라한 보병’을 노래했고 존 바에즈는 기타를 치며 “우리는 승리하리라”를 약속했다.
민권법의 통과와 흑백분리정책의 종식, 경찰 과잉진압으로부터의 보호와 흑인들의 취업을 촉구하는 리더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34세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의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다.
연단에 선 킹목사는 처음엔 8명 자문단과 함께 작성한 원고를 충실히 따라 갔다. 한 10분쯤 지나갔을 때 킹 목사는 연설문 원고를 옆으로 제쳐놓고 양손으로 연단을 움켜쥐었다. 원고대로 연설하는 일이 드문 킹목사에겐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때 연단 가까이에 있던 마할리아 잭슨이 외쳤다 : “당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해요, 마틴”킹목사는 구름처럼 모여든 인파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우리가 비록 오늘과 내일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해도 난 오늘 나의 친구인 여러분께 말하려 합니다, 나에겐 아직 꿈이 있습니다…아메리칸드림 안에 뿌리내린 꿈입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깨어나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자명한 진리를 믿는’ 미국 신조의 참된 의미를 지키며 살아가는 꿈입니다”그는 정의와 평등에서 인종을 초월하는 보다 깊은 인간적 유대로 옮겨가며 7번이나 “꿈이 있습니다”를 되풀이 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전 노예의 아들들과 전 노예소유주의 아들들이 형제애의 테이블에 함께 앉을 수 있는 꿈입니다…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어린 네 아이들이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 살게 되는 꿈입니다”모든 신의 자녀들이 손잡고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고 함께 노래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라”는 외침으로 그는 17분간의 연설을 끝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백악관에서 TV로 지켜본 당대의 연설가 케네디도 “정말 죽이게 잘 하는군”, 감탄을 토해냈다. 미 사상 최대의 시위는 평화롭게 끝났고 “미 전국 모든 가정, 모든 사람들의 눈은 젖어 있었다. 그것은 변화하는 순간의 미국이었다”고 흑인가수 해리 벨라폰테는 회상한다.
그 후 민권운동 유혈화가 악화되면서 킹목사 스스로 “나의 꿈이 악몽으로 변했다”고 개탄도 했지만 이날의 행진과 연설은 같은 해 11월 케네디 암살과 함께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 통과의 길을 닦았다. 킹목사도 1968년 봄 암살당하기 몇 달 전 “언젠가는 정의가 거대한 강처럼 흘러내릴 것”이라며 자신의 꿈을 다시 강조했다.
꿈의 실현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꿈 연설’은 “모든 미국인 앞에 세워진 거울이 되어 이 나라 영혼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했다”고 콜린 전 장관은 말한다. 흑인 뿐 아니라 백인도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고 ‘진정한 평등’을 미국의 이상으로 끌어안는 기회가 된 것이다.
‘꿈의 완성’을 타임의 특집은 이렇게 비유한다. “미국이 번영하려면 라틴 음악 레게톤을 듣는 아이, 김치를 먹는 아이, 후드티를 입은 아이들이 킹 목사의 꿈이 주는 약속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 그것은 오늘날 이 나라가 보여주는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이 미국이 추구하는 최선의 가치 중 하나라는 사실을 미국민 자신이 인정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어제를 시작으로 일 주일간 계속될 50주년 기념행사 중에는 오는 28일, 킹목사가 연설을 시작했던 오후 3시 전국 곳곳에서 교회의 종을 울리는 이벤트도 있다. “울려 퍼지는 자유”를 상징할 그 종소리는 ‘다양성’의 한 부분인 우리에게도 킹목사 꿈의 완성을 위해 동참을 결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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