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건국이념을 담은 독립선언서 제2장은 만인의 평등을 강조하며 시작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all men are created equal),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지난주 잇단 대형 판결들을 쏟아내며 막 내린 연방대법원의 2012-2013년 회기의 중심 테마도 ‘평등(equality)’이었다. 대법원은 금년회기 최대 이슈로 꼽혀온 소수계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과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그리고 동성결혼 판결을 통해 대학에 가고, 투표하고, 결혼하는 사람들의 평등한 기본권을 헌법이 어디까지,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평등’에 대한 헌법적 해석과 대법관들의 신념, 진화하는 대법원의 이념성향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일련의 판결들을 하나의 일관된 평가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보통사람들에겐 클라이맥스를 이룬 마지막 주 3개의 판결만 해도 일견 모순으로 느껴진다.
월요일엔 주립대학 입학사정에서 어퍼머티브 액션 사용유지를 허용했다. 그러나 캠퍼스 내 다양성 실현을 위해 인종관련 없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는지 ‘엄격한 검사’를 명령함으로써 앞으로 어퍼머티브 액션의 적용을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게 제한시켰다. 우려했던 위헌 결정은 일단 유보했으나 정책 자체는 대폭 축소시킨 것이다.
화요일엔 보수파 대법관들이 다함께 지지하고 진보파가 일치단결 반대한 5대4의 판결로 투표권법의 일부를 무효화시켰다. 소수민 유권자에 대한 차별을 막기 위한 연방정부의 제도를 지방정부에 대한 권리침해로 간주하여 원천봉쇄한 것이다. 긴 세월 힘든 투쟁 끝에 성사시켰던 ‘역사적’ 투표권법 핵심조항에 대한 위헌판결이었다.
수요일엔 합법적으로 결혼한 동성커플의 부부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연방결혼보호법에 위헌 판결을 내리고 캘리포니아에서의 동성커플 결혼에 대한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동성애자들에게 정치적, 사회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 ‘역사적 승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3가지 판결은 간단히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 소수민 학생들은 더 이상 대학입학에서 백인보다 불리하지 않다. 남부 주들이 다른 지역보다 소수민 유권자들을 더 차별하려는 것 아니다. 동성커플이 이성커플보다 자유와 혜택을 덜 받아서는 안 된다.
판결의 근거는 대법원에 의하면 ‘시대의 변화’다. “이제는 더 이상 인종차별이 당연시되던 1960년대가 아니다, 여론의 80% 가까이가 동성애를 반대하던 1990년대도 아니다, 차별에 대한 시각도 바뀌었다, 평등권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이렇게 평등권에 대한 재정의를 시작한 금년회기의 주요요소로 전문가들은 두 가지를 꼽는다. ‘스윙보트’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의 일관된 신념과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보수화를 향해 가는 치밀한 장기적 플랜이다.
금년회기는 ‘케네디의 법정’이었다. 유일하게 3가지 판결 모두에서 다수의견에 속했던 케네디는 주 정부 권한을 존중하고 연방의 권한에 회의적이며 개인의 권리에 절대적 공감을 표해왔다. “헌법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며 그것은 정부가 인종과 민족, 성적 취향을 근거로 국민을 분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전제한 그는 “인종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진보적 예전 법도,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보수적 근래법도 ‘평등한 정의’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진보적 법조계가 우려하며 주목하는 것은 체계적 전략에 의해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보수화를 다져가는 ‘로버츠 대법원’이다. 투표권법 무효화는 로버츠가 2009년부터 치밀하게 씨 뿌려 성공시킨 케이스이며 로버츠 대법원은 지난 반세기 이래 가장 친기업적인 법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회기에도 소비자의 집단소송에 대폭 제한을 가했고 직장내 차별에 대한 고용주의 책임을 한결 덜어주는 등 근로자, 소비자, 구멍가게, 개인보다는 압도적으로 대기업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가 앞으로 20년은 더 봉직할 젊은 대법원장이라는 사실은. 대법원의 보수화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미 투표권법 무효화의 여파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부 6개주가 유권자 신분증 제시를 비롯한 투표법 개정에 착수했다. ‘합법적’ 동성결혼 차별은 위헌으로 판정 났지만 30여개 주에선 동성결혼이 금지되고 있으며 동성애자란 이유로 해고를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법적 성차별이 사라진지 오래여도 여전히 여성의 임금은 남성임금의 79%에 머물러 있다. 이중 무엇이 ‘대법원이 인정할 수 있는’ 뚜렷한 차별로 증명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지난주의 ‘세기적’ 판결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가 차별이고, 어디까지가 민권보호이며, 진정한 평등은 무엇인가는 여전히 논쟁의 주제로 남겨진 것이다. 모든 여성과 이민자, 모든 인종과 모든 민족, 모든 종교와 모든 취향을 가진 만인의 평등권은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부단히 지켜야할 대상이라는 뜻이다. 연방대법원 청사 정면에 새겨진 미 건국의 약속, “법 앞에 평등한 정의” 실현은 아직 갈 길 먼 여정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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