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엔나 문화기행 ②미술 도시
▶ ‘세기말 비엔나’대표하는 위대한 예술혼 강렬한 느낌 설레 걸작 보며 색다른 흥분 제체시온·벨베데레 등 세계적 미술관 즐비
에곤 실레의‘포옹’
클림트가 제체시온 전시장 벽면에 그린 ‘베토벤 프리즈’의 마지막 부분.
비엔나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이미지는 두가지, 모차르트와 ‘키스’다. 어딜 가나 모차르트 이름이 붙은 상점과 상품이 있고, 어디서나 클림트의 그림 ‘키스’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수많은 뮤지엄 스토어와 기념품 상점들은 티셔츠, 카드, 수첩, 포스터, 스카프, 머그잔에까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들로 도배하고 있어서 눈 돌리는 곳마다 금박장식의 꽃밭에 누워있는 두 연인을 만날 수 있었다.
예술작품이 지나치게 유명한 것은 작품에나 감상자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 ‘키스’는 ‘모나리자’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작품이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직접 본 ‘키스’와 ‘모나리자’가 그렇게 좋았는지, 그동안 수없이 보아온 사진이나 복제품들에서보다 더한 감동을 받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벨베데레(Belvedere) 미술관의 가장 좋은 곳에 걸려있는 ‘키스’는 파리 루브르의 ‘모나리자’ 만큼은 아니지만 언제나 주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걸작이다.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크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색상, 세밀한 장식, 환상적이고 신비한 표정이 정말 매혹적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너무 많이 봐서 질린다고 할까, 그저 눈에 익은 그림을 실제로 본다는 확인일 뿐, 대작 앞에서 경탄이 나오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반면 이번 여행에서 우리 일행 모두를 매혹시킨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에곤 실레(Egon Schiele)다. 실레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마치 이번에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다들 흥분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직접 대했을 때 느낌이 특별했으며, 어떤 전시장에 가도 그의 작품만 눈에 들어왔고, 언제나 보는 이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고약하게 뒤틀리고, 괴팍하게 일그러진 사람들의 모습은 괴물 같은 현대인의 속내와 너무도 닮아있다. 불안하고 거칠고 반항적인 눈빛은 도발하지만 상처입고, 갈망하나 곧 절망하는 인간의 심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단순한 배경에 선이 살아서 꿈틀대는 드로잉들이 압권이었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 두 사람은 ‘세기말 비엔나’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그리고 비엔나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바로 이 세기말 비엔나의 천재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보러간다는 말과 같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예술의 자유를”이것은 19세기말 비엔나의 젊은 화가와 건축가들이 구시대의 낡은 전통과 절연하고 새로운 미술운동을 벌인 ‘분리파’(Secession, 제체시온)의 모토다. 클림트를 초대회장으로 조직된 분리파는 그들만의 전시장이며 회관인 제체시온을 건축하고 잡지 ‘성스러운 봄’을 발간했으며,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매번 수만명이 찾아오는 등 회를 거듭할수록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그중 가장 유명했으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전시회가 1902년 베토벤에게 헌정된 제14회 전시회다. 건축가 요셉 호프만의 디자인으로 전시장 한가운데 막스 클링거가 제작한 베토벤 기념상을 세워놓고, 전시장의 위쪽의 3개 벽면을 돌아가며 클림트가 대형벽화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를 그렸으며, 개막식에서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이었던 말러가 금관주자 20여명을 데리고 와서 자신이 편곡한 ‘환희의 송가’를 연주했다.
얼마나 멋지고 역사적인 행사였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생각해보라. 쉴러의 시에 붙인 베토벤의 음악이 클림트의 미술을 탄생시켰고, 그에 맞춰 말러가 지휘하는 장면을. 음악, 미술, 문학, 건축, 조각이 한자리에서 영웅 베토벤을 기리는 전대미문의 퍼포먼스가 열린 것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제체시온은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채 말없이 서있었다. 지하 전시장에 들어가 클림트의 벽화를 둘러보면서 ‘환희의 송가’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공간은 침묵뿐이었다. 우리는 다들 화난 사람처럼 서로 떨어져서 조용히 인생의 괴로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를 바라보았다.
비엔나에는 너무 많은 미술관이 있어서 유명한 몇 군데 밖에는 다 돌아볼 수 없었다. 제체시온을 비롯해 벨베데레 미술관, 빈 미술사박물관, 알베르티나 뮤지엄, 레오폴드 뮤지엄, 무목 현대미술관, 쿤스트하우스 등. 빈의 예술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생소한 이름들일 수 있으나 하나같이 세계적인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들이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 혹은 뉴욕 메트로폴리탄처럼 너무 크고 거대해서 하루 종일 돌아도 다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감상하고 돌아서기 좋은 규모여서 오히려 더 편안하게 다닐 수 있었다.
벨베데레는 17세기 터키 침공을 물리친 영웅 오이겐 공의 여름궁전이었으나 합스부르크 왕정이 무너진 후 국립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상궁과 하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의 하궁에는 중세에서 바로크 작품들이 전시돼있고, 남쪽의 상궁에 우리가 아는 19세기와 20세기 회화들-키스와 유디트 등 클림트 그림들과 인상파 화가들의 것, 말러의 아내 알마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며 ‘바람의 신부’를 그린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모여 있다.
빈 시내 호프부르크 왕궁에 위치한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은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는 쌍둥이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동쪽이 미술사박물관, 서쪽은 자연사박물관인데 시간 관계상 미술사박물관만을 방문했다. 거대한 대리석 인테리어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미술사박물관은 황실에서 수백년간 모아온 소장품과 여러 궁전들에 산재해있던 것들을 모아 정리해놓은 미술관이다. 고대 예술품으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렘브란트와 루벤스, 피터 브뤼겔의 귀한 작품이 많아서 정신없이 구경했는데, 놀랍게도 여기서 루벤스의 드로잉 ‘한복을 입은 남자’와 직접 연관된 대형제단화를 보게된 것은 특별한 선물이었다. 루벤스는 ‘한복을 입은 남자’ 드로잉에서 그려본 한복과 모자를 하비에르 선교사의 기적을 묘사한 이 대형제단화에서 한 이국인이 입고 있는 의상으로 등장시켰다. 그래서 지난 번 게티센터 전시에 이 제단화의 사진판이 함께 전시됐고, 그 설명을 스테파니 슈레이더 큐레이터에게서 인상 깊게 들었는데 바로 여기서 오리지널을 만난 것이다. 그 놀라움과 감격이란...
대충 대충 다 떼먹고 쓰는데도 지면이 모자라 너무나 좋았던 알베르티나 뮤지엄과 에곤 실레를 가장 많이 소장한 레오폴드 뮤지엄, 중부유럽 최대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자랑하는 무목(MUMOK) 현대미술관, 뮤지엄과 공방들이 모여있는 무제움 큐바르티어(MQ) 등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수 없음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궁금한 분들은 직접 한번 다녀오시기를.
<글·사진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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