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의 대가로 명성…‘그래피티’ 초연 방문
동문수학한 살로넨 감독 때부터 LA필과 친분
클래식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올 들어 두 번이나 LA에서 진은숙의 신곡 세계 초연이 있었다. 지난 26일 LA 필하모닉의 뉴뮤직그룹이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로 ‘그래피티’(Graffiti)를 초연했고, 한 달 전에는 사우스웨스트 체임버가 ‘코스미기믹스’(Cosmigimicks)란 작품을 미국서 처음 연주했다. 우리는 ‘세계적’이란 말을 좋아하고 자주 쓰는데, 진은숙만큼 세계적인 작곡가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녀는 현대음악에 생소한 한국인들에게 보다 오히려 국제무대에서 더 널리 알려지고 높이 평가받는 뮤지션이다. 그에게 위촉된 작품은 2020년까지 꽉 차 있는데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필, 보스턴 심포니,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코벤트가든 등 어마어마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들이 그의 신작이 나오기를 ‘목을 빼고’기다리는 중이다. 같은 뮤지션이라도 ‘재연’이 목적인 연주자들보다 ‘창작’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작곡가라는 점에서 그에게는 틀에 박힌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과는 무게와 위상과 차원이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피티’ 초연 참석차 독일에서 LA로 날아온 진은숙(52)을 만났다.
1년 전 서울시향 연주에서 만났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진은숙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단아하고 매력적이며 페미닌하다. 작은 키에 날씬하고 정돈된 매무새,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52세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귀여운’ 여자. 말수가 적고 약간은 샤이한 듯한 이 여성에게서 그렇게 파워풀한 음악이 나온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 혹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LA 필은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어서 가족 같고 편안합니다. 내 곡을 좋아하고, 같이 일하기 원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LA 필과 가장 많이 일하고 있지요. 2015년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디즈니홀에서 공연될 것 같습니다”
현대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펄쩍 뛰며 반가워해야 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Wonderland)는 원래 LA 오페라가 위촉한 작품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바람에 정작 여기서는 구경도 못해 봤기 때문이다.
이 오페라를 위촉했던 당시 LA 오페라의 켄트 나가노 음악감독은 2006년 독일 바바리안 스테이트 오페라로 옮기면서 이 작품을 가져갔으며, 2007년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아힘 프라이어(LA 오페라 ‘링사이클’ 감독했던) 연출로 초연하자마자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다. 이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며 화제를 모았지만 LA 무대에는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는 점에서 LA 필의 공연 계획은 음악팬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진은숙은 현재 속편‘ 거울 뒤의 앨리스’ (Alice through the Looking Glass)를 쓰고 있다).
에사 페카 살로넨 시절부터 LA 필과 인연을 맺어 ‘칸타트릭스 소프라니카’(2006), 생황협주곡 ‘수’ (2009), ‘솔로 퍼쿠션 일렉트로닉스를 위한 알레그로
마논 트로포’ (2011)‘, 그래피티’ (2013)를 LA 필 위촉으로 초연한 그는 지금도 살로넨과 가깝게 지내며 그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서 현대 음악 시리즈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우린 둘 다 리게티의 제자인데, 살로넨은 선생님에게 하도 야단을 많이 맞아서 트라우마가 있어요. 그런데 나도 그랬기 때문에 우리 사이엔 동료의식 같은 게 있어서 서로 그 얘길 하며 웃곤 하지요. 살로넨은 지휘자이기에 앞서 작곡가여서 저를 만나면 작곡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고 싶어합니다”
서울시향에서도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의 음악감독을 8년째 맡고 있는 그는 이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내 인생에서 작곡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곡 선정에서부터 지휘자와 솔로이스트 선정, 해설, 젊은 작곡가들을 위한 매스터 클래스 등 전체 프로그램을 진두 지휘하면서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는지 몰라요. 처음엔 현대음악이라 시큰둥했지만 지금은 고정 팬들도 생기고 좋은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요즘 젊은 작곡가들이 어떠냐고 묻자“ 숫자는 많은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세대가 달라서요. 목숨 걸고 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이게 목숨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데, 요즘 한국은 창작하는 사람이 나오기 힘든 여건입니다. 사회 전체의 가치관이 너무 물질적이고 돈이 우선이니까요”
‘목숨 걸고’ 만드는 진은숙의 음악은 음표들이 서로 대립하고 조화하면서 강렬하고 불가사의한 색채감을 뿜어낸다. 그가 악기들을 다루는 방식, 빚어내는 독창적인 화음, 난해하면서도 정서적 보편성을 잃지 않는 그의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성에 도전하며 듣는 사람을 매혹시킨다. 그것이 사이먼 래틀이 ‘세계 작곡계를 이끌 5인 중 하나’로 꼽았던 이유가 아닐까.
“곡 위촉에서 완성까지 4~5년 걸려”
■ 인/터/뷰
불만이 나의 작곡 원동력
-왜 작곡가가 되고 싶었나요?
“사실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집안형편이 안 되서 세컨 초이스로 작곡을 택했습니다. 열세 살 때 음악선생이 작곡을 해보라고 권해서 시작했어요. 그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전했지요” (그가 악보를 빌려다 수백장씩 베끼며 공부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작곡의 영감은 어디서 옵니까?
“살아가는 일상에서 총체적으로 옵니다. 특별히 불만이 나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죠. 곡을 하나 썼는데 불만스러우면 다른 곡을 쓰면서 그걸 해결해 보려고 애쓰게 되요. 곡에서 곡으로 불만이 연결되면서 좀 더 마음에 드는 창작을 위해 계속 나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위촉 받으면 거기에 맞춰서 곡을 쓰나요?
“혼자 맘대로 하는 건 아니에요. 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여러 개 갖고 있다가 위촉이 오면 어울릴 만한 아이디어를 연결시키고 위촉자와 상의해 결정한 다음 창작을 진행하게 됩니다”
-위촉에서 완성까지 얼마나 걸리는지요?
“보통 몇 년 동안 머릿속에 준비하다가 쓰기 때문에 4~5년 정도의 시간이 있어야 완성할 수 있어요. 곡을 많이 쓰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일 년에 하나 정도밖에는 안 나옵니다”
-초연에 참석했을 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같은 음악이 나옵니까?
“대부분 원하는 대로 연주가 나오지만 생각과는 다를 때도 있어요. 새 곡에는 언제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그 것이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죠”
-작품을 가장 맘에 들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꼽는다면?
“확실히 유럽의 현대음악 전문 앙상블들이 잘 합니다. 전문성도 있고 연습도 충분히 하죠”
-작품에 담는 의미나 메시지가 있습니까?
“각자 듣고 나름대로 뭔가 받아가는게 있기를 바랄 뿐이지, 특별히 깊은 의미를 담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현대음악은 어렵다는 사람이 많은데요.
“현대음악만 어려운 게 아니라 모든 음악이 어렵습니다. 음악은 추상예술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쉽다고 생각하는 바흐의 푸가 같은 것도 성부가 복잡해지면 복합적이고 어렵기 때문에 세부적인 부분을 들을 수 없답니다”
-현대음악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요?
“많이 들어야 해요. 음악은 경험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도 20대에 들었던 음악과 지금 듣는 음악이 다르거든요. 호기심을 갖고 자꾸 들어서 익숙해져야 하고, 그래서 자기 의견을 만드는 것이 현대음악과 친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진중권·진회숙과‘지성계 3남매
서울대 작곡과 강석희 교수의 제자로, 학생시절 권위 있는 가우데아무스 작곡콩쿠르에서 1등 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5년 독일로 유학, 함부르크 음대에서 거장 죄르지 리게티를 사사했고 2004년 세계최고 권위의 작곡상인 그라베마이어상을, 2005년 아르놀트 쇤베르크 상을, 지난해 호암상을 수상했다. 도이체 심포니와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이며 최근 2014년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의 상주작곡가로 선정됐다. 최근 독일의 음악학자 슈테판 드레스가 진은숙의 삶과 음악을 해설한 책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의 번역서가 한국서 출간됐다.
남동생이 문화비평가 진중권, 언니가 음악평론가 진회숙으로, 삼남매가 한국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란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으며 핀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마리스 고토니와 결혼, 아들이 한 명 있다.
<글 정숙희·사진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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