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 오늘, 1965년 3월7일은 미국 민권투쟁사에서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로 불린다. 인종과 피부색, 언어와 신분에 상관없이 차별받지 않고 투표할 권리를 보장한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통과에 중요한 계기가 된 날이다.
그날 민권운동가들을 중심으로 600여명이 미 남부 앨라배마 주 셀마에 모였다. 그들이 계획한 것은 투표권법 통과를 지지하는 평화행진이었다. 주도 몽고메리를 향한 행진은 얼마 못가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 이르렀을 때 곤봉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주 경찰의 강력진압에 의해 저지당했다. 행진은 중단됐지만 경찰의 무자비한 난타로 수십명의 부상자가 피 흘리며 쓰러진 유혈의 현장은 미 전국에 TV로 방영되면서 투표권법 지지운동을 전국적으로 불붙이는 촉매가 되었다.
이틀 후 2,500명이 참가한 2차 행진이 열렸다. 이날 행진 자체는 짧게 끝났으나 동참했던 백인목사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테러로 사망하면서 분노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2주후 행진의 헌법상 권리를 인정한 연방판결이 나오면서 행진은 재개되었다. 마침내 3월25일, 2만5,000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몽고메리에 위치한 주의회 청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흘에 걸친 고된 행군이었다. 테러가 두려워 국가방위군의 호위를 받아야 했고 빗속 진흙길을 건너야했으며 백인여성 민권운동가가 KKK단에 암살당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투표권법은 그해 여름, 린든 존슨 대통령의 서명으로 입법화되었다.
지난 주말 셀마의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에선 조 바이든 부통령과 함께 5,000여명이 참가한 ‘피의 일요일’ 48주년 기념행진이 있었고, 지난달 27일엔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한 ‘민권운동의 어머니’ 로자 팍스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동상 제막식도 열렸다.
그리고 같은 날, 의사당 길 건너편 연방대법원에선 투표권법 위헌소송의 심리가 시작되었다. 생명을 건 투쟁으로 얻어낸 투표권법이 반세기도 채 안되어 다시 법정에 선 것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15조와 민권법이 통과된 후에도 남부에서의 투표권 차별은 좀처럼 시정되지 않았다. 흑인의 유권자등록과 투표권 행사를 방해하는 남부 주정부들의 차별법은 연방당국의 폐지노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속출했다. 유자격 유권자를 가려낸다며 문맹테스트를 실시하고 투표세를 부과하는 가하면 유권자 등록을 감행한 흑인교사 30여명에 집단해고 조처를 내리기도 했다.
1965년의 투표권법은 남부 주들의 끈질긴 차별에 지친 연방의회가 이들에게 내린 일종의 처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대법원이 그 처벌을 끝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번 소송에서 폐지 위험에 직면한 것은 투표권법의 핵심인 제5항이다. 소수계 유권자에 대한 심각한 차별전력을 가진 주와 카운티의 명단을 공개지정하고 이 지역에서 선거법을 변경하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연방당국에 사전승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는 조항이다. 현재 남부 7개주를 포함한 9개 주와 캘리포니아, 뉴욕 등 7개주의 54개 카운티 등이 연방의 감독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다.
투표권법의 효과는 드라마틱했다. 당시 남부의 흑인 유권자 등록은 해마다 급증했고 최근에도 연방당국은 제5항을 근거로 각 지역정부의 흑인뿐 아니라 라티노, 아시안 등 모든 소수계에 대한 투표권 저해 시도를 철저하게 차단해 왔다.
이번 대법원이 심리하는 소송은 선거법 변경을 거부당한 앨라배마 주 쉘비카운티가 연방법무부를 상대로 제기한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사전승인’이 필요 없을 만큼 상황이 개선되었으며 특정 지역만 감독 대상으로 낙인찍는 것은 공정치 않다는 주장이다.
대법원의 다수인 보수파 대법관들은 상당히 동조하는 기색이다. 지난주 심리에서도 이들은 “남부도 이젠 변했다”면서 “남부 주민이 북부 주민보다 더 인종차별적이라는 것이 연방정부 시각이냐”고 되물었다. 특히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은 제5항을 “영원한 인종적 자격부여”라고 표현했다. 자격 없는 소수계 유권자들이 투표권보호를 받고 있다는 뉘앙스가 역력하다.
사실 연방의 지방정부 간섭이라 할 수 있는 제5항은 처음 입법 당시부터 5년 후 재승인을 받도록 규정되었다. 의회는 그에 따라 1970년과 1975년, 1982년, 2006년, 이렇게 지금까지 4번 연장을 재승인해 왔다. 매번 초당적으로 압도적 지지를 받아 통과시켰다. 마지막으로 2006년 부시대통령 때 25년 연장안을 승인했으니 2031년까지는 유효해야 한다.
물론 남부도 변했다. 이제 노골적인 차별은 사라졌다. 그러나 달라진 형태의 교묘한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다. 투표시 신분증 지참에서부터 투표소 이전, 조기투표 제한, 소수계의 표 분산 노리는 선거구 재조정 등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고 이 같은 변경의 대부분은 제5항을 적용한 연방당국에 의해 사전 차단되어 왔다. 제5항은 그 존재만으로도 소수계에 대한 투표권 차별 억제 효과를 발휘하는 가장 효과적인 민권법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데 연방대법원이 제동을 걸 조짐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피의 일요일’을 되새기며 투표권법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어진 정의인가를 기억해야할 사람은, 그러나 보수파 대법관들만은 아니다.
소수민의 한 표가 얼마나 힘들게 얻어졌으며, 얼마나 쉽게 잃을 수 있는 지를 계속 다짐해야하는 것은 선거 때마다 “귀찮아서, 바빠서” 별 생각 없이 기권하는 우리들이다. 우리의 투표권은 거저 얻은 게 아니다. 앞서 온 소수민들이 뼈아픈 수모를 딛고 피 흘리며 쟁취한 권리에 편승한 우리가 그들에게 지고 있는 빚이다. 적극적으로 행사해 보다 평등한 사회정의 실현으로 갚아야 할 빚이다. 그러므로 소수민의 한 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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