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 개막 게티 뮤지엄‘ 루벤스전’기획
▶ 큐레이터 스테파니 슈레이더
게티 뮤지엄의 스테파니 슈레이더 큐레이터가‘한복을 입은 남자’의 매력과 신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피터 폴 루벤스의‘한복을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는 가로 23.5, 세로 38.4센티미터의 크지 않은 드로잉이다. 얼굴에 약간의 붉은 터치가 있을 뿐 검은 초크로 그린 이 그림은 의상표현이나 서있는 자세, 표정 등이 특이하고 섬세해서 찬탄을 자아내는 작품이지만, 사실은 좀 의아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루벤스가 그린 수많은 작품 중에서 왜 이 그림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거 하나 갖고 한인 커뮤니티를 들썩거리고, 대대적인 패션쇼를 열고, 한국서 복식 전문가들을 초청해 세미나까지 열다니, 우린 고맙기 짝이 없지만 게티로서는 좀 오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주 이 작품을 거의 10년 동안 연구해온 큐레이터 스테파니 슈레이더(Stephanie Schrader)를 만나 인터뷰하면서 궁금증이 모두 풀렸다. 그리고 게티뮤지엄과 그녀에 대해 무한한 감사와 찬사를 갖게 됐다는 사실도 밝혀야겠다.
유럽 매혹시킨 드로잉
작품 속 주인공 누구?
루벤스는 왜 그렸을까?
샴 대사로 불린 이유? 등
초상화·역사·의상 비교
“‘한복을 입은 남자’는 게티가 소장한 루벤스의 드로잉 8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얼굴 표정이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고,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서 자꾸 다시 보게 되는 작품이죠. 루벤스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무려 400년 전에 그는 왜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매혹되고 호기심을 가졌을까, 모두 경이로울 뿐입니다”
3월5일 개막되는 ‘동쪽을 보다: 루벤스와 아시아의 만남’ (Looking East: Rubens’ s Encounter with Asia)은 수천점의 회화를 남긴 대가 루벤스의 전시라기보다, 그가 그린 단 한 점의 드로잉 ‘한복을 입은 남자’에 관한 전시다.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루벤스는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 어떻게 지금의 정체성을 갖게 됐는지, 많은 의문점을 풀어보면서 관람객들과 함께 다시 묻고 답하고 의심해 보는 특별한 기획전이다.
웨스트 파빌리온 1층 드로잉 갤러리에 마련된 전시는 그다지 크지 않다. 총 디스플레이는 25점. 이 중 루벤스의 작품은 ‘한복을 입은 남자’ 포함 6점이고, 이를 모방한 다른 작가들의 드로잉과 판화 2점, 한국서 대여해 온 조선시대 초상화 2점과 의상 3점(답호, 철릭, 방건), 코레아가 최초로 표기된 세계지도 3점, 루벤스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접했던 중국 선교사 관련 그림과 책, 자료들이 전부다. 이 외에 현대작가 김태순의 종이한복 작품‘( 조선의 얼’ 2006) 한 점이 입구에 전시되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한복을 입은 남자’의 숙제를 풀기 위해 동원된 조연들이다.
2004년부터 이 작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스테파티 슈레이더는 “이 드로잉은 1983년 게티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32만4,000파운드(약 50만달러)에 사들여 세상에 공개되자마자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고 전한다.
“수백년 동안 개인 소장가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게티 구입 전에는 작품의 존재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본 한국과 미주 한인사회의 관심이 커졌고, 2002년과 2010년 한국서 전시된 후에는 이에 관한 책들(곽차섭의 ‘조선 청년 안토니오 코레아 루벤스를 만나다’와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 등)까지 출간되는 등 갈수록 유명해졌지요. 우리에겐 그저 수많은 드로잉 중 하나였지만 한국에선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인 그림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 정체성에 의문을 품고 오랫동안 세밀하게 조사했다는 슈레이더는 루벤스의 시대배경과 세계정세, 그가 접했을 만한 책들, 루벤스와 당시 화가들의 초상화, 의상 스타일 등 문화 역사적 상황을 총체적으로 찾아보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했다. 한국을 방문해 한복 전문가들도 만났고, 김영재 민속박물관장과 버글린드 융만 UCLA 한국미술사 교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그는 이 그림을 인물 초상이라기보다는‘ 의상에 관한 연구 드로잉’으로 보고 있다.
“그림의 전체 구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의상이고, 사람의 얼굴은 아주 작은 부분이죠. 루벤스의 초상화는 머리만 그리는 스타일인데 그와 전혀 다를 뿐더러, 전신을 그리는 일반 초상화들과도 달리 바지와 신발이 안 보인다는 점에서 포트레가 아니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세상에 내놓으려고 그린 작품이 아니라 개인 습작용 드로잉이었다고 한다. 루벤스는 그림의 소재로 쓸 아이디어를 위해 500여점의 드로잉을 그려서 보관해 두었는데 이 것도 그 중 하나였으며 동양 의상에 관한 스케치였을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루벤스는 한국에 대해 잘 몰랐지만, 당시 중국 선교사들을 통해 들었을 것입니다. 네덜란드 궁정화가이며 외교관으로서 이국적인 의상과 모자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가졌던 그가 어쩌면 중국 선교사들이 가져온 한국 의상을 보고 상상을 동원해 그렸을 가능성이 크죠”
19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는 일본과 중국에 나갔던 선교사들과 상인들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진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린 1617년에 루벤스는 예수회의 위탁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선교사들의 업적을 그리고 있었다. 당시에도 선교사들은 고국에 돌아오면 모금을 위한 선교보고를 하곤 했는데, 예수회의 독실한 신자였던 루벤스는 그들의 선교활동을 알리기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예수회 지도자였던 프란시스 하비에르가 고아(현 인도)에서 행한 기적을 보여주는 대형 제단화(The Miracles of St. Francis Xavier Altarpiece)도 이때 작품인데, 여기에 ‘한복을 입은 남자’ 드로잉과 비슷한 조선 사람으로 보이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번 전시에는 이 제단화의 제작을 위해 남긴 드로잉과 판화, 견본 소품 등이 소개되는데 이를 통해 루벤스가 아시안 의상과 관모까지 동원하여 가톨릭 선교의 승리를 나타내려 했음을 보여주게 된다.
이 작품은 처음 그려졌을 때부터 보는 사람을 매혹시켰다. 루벤스가 운영하던 스튜디오에서는 학생들이 이 그림을 카피해서 그렸고, 18세기엔 판화로 제작돼 널리 유통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루벤스의 제자였던 빌렘 파넬스(Willem Panneels)가 초상화 연구를 위해 얼굴 부분만 따서 붉은 색 초크로 그린 작품(Head of Man in Korean Costume)과 150여년 후 영국 화가 윌리엄 베일리(William Baillie)가 거의 똑같이 판화로 남긴‘ 샴 대사’(Siamese Ambassador)를 볼 수 있다. 바로 이 제목 때문에 루벤스의 원화마저 ‘샴 대사’라는 이름을 달고 거의 400년을 지내왔던 것이다. 또한 남자의 얼굴이 전형적인 한국인 이목구비와는 다르다는 점도 그가 몽골, 중국인, 샴족 등으로 오해 받아온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때 이 그림의 주인공은 이탈리아에 살았던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에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카를레티를 따라 로마까지 가게 된 안토니오란 인물이 나오는데, 루벤스가 로마에 머물던 시기에 그를 만나 초상화에 담았다는 것이 그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슈레이더는 말한다.“ 멋진 얘기이긴 하지만 신빙성이 없다”는 그는“ 노예로 끌려온 안토니오가 그렇게 좋은 실크 옷을 입고 있을 수도 없고, 책 자체가 카를레티 사후에 나온 것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복을 입은 남자’는 답보다 의문이 많은 작품”이라고 말한 슈레이더는 “아직도 답은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수백년 동안 사람들을 매혹시켜 온 것처럼 앞으로도 수백년간 많은 이들을 매혹시킬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때마다 어떤 해석이 나오고 어떤 답을 갖게 될지는 우리도 모른다”고 말한 그는 “각자 보기 나름이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이‘ 한복을 입은 남자’의 특별함”이라고 설명했다.
게티 센터는 4일 프리뷰와 오프닝 리셉션을 갖고 5일 개막, 6월9일까지 전시한다.
1200 Getty Center Dr. LA, CA
90049, (310)440-7300, www.getty.edu
●스테파니 슈레이더
미술사 전공으로 옥시덴탈 칼리지에서 학사, 오벌린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슈레이더는 고교시절 학생대사로 아시아 지역을 여행했고 한국서 체류한 적도 있어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다. 1993~96년 게티에서 인턴으로 일했고, UC샌타바바라 박사과정을 마친 후 2001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게티에 돌아와 전공인 더치 드로잉관련 전시들을 성공적으로 유치했으며, 2008년 곤충과 식물 그림으로 유명한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 전시로 주목받았다. 어소시엣 큐레이터가 된 후 기획한 것이 이번 루벤스 전으로, 이 전시의 책자도 출간했다.
<정숙희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