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othing Congress, 아무 것도 안하는 의회’는 1948년 경제위기의 어려운 상황에서 재선에 성공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의 캠페인 구호였다. 46년 중간선거에서 압승한 공화당 주도 연방의회는 사사건건 민주당 백악관의 정책을 반대하며 국정의 발목을 잡았었다.
그러나 금년 새해 첫날까지 한 밤중 표결소동으로 간신히 재정절벽 추락을 모면하며 끝낸 112대 의회에 비하면 당시의 의회는 ‘아무 것도 안하는’ 무위도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2차 대전 후 유럽경제 재건을 위한 재정지원정책인 마샬플랜을 비롯하여 입법화시킨 법안이 무려 906건이나 된다. 112대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은? 관련공식집계가 시작된 1974년 이후 가장 적은 230여건, 그나마 60건 가까이는 마크 트웨인 기념주화 발행이나 우체국 건물 이름 변경 같은 별 볼일 없는 법안들이다.
생산성만 사상 최저가 아니다. 112대 의회는 지지도에서도 최저를 기록했다. 지난여름 갤럽에선 10%, 뉴욕타임스 조사에선 9% - 의회 업무평가 여론을 꾸준히 측정해온 갤럽조사에 나타난 지난 38년간의 지지도 평균이 34%이니 폭락에 폭락을 거듭한 것이다.
미디어의 의회 때리기도 과격하다. 워싱턴포스트의 유진 로빈슨은 “자신들이 만든 재정절벽이라는 가짜 위기를 제대로 처리 못해 진짜 위기로 둔갑시킨 어릿광대들의 쇼”라고 비난하면서 이런 비유에 ‘직업 광대들이 모욕을 느낄 것’이라고 걱정까지 덧붙였다. 폴리티코의 로저 사이먼은 “의사당의 바보들(Fools on the Hill)”이라고 직격탄을 날렸고 USA 투데이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신뢰도와 위치를 격하시키고 있는” 의회가 마치 미국에 대한 ‘적대국가’인듯하다고 개탄했다.
지난 주 새 의회가 개원했다. 여성과 소수계가 늘고 불교신자와 동성애자임을 공개한 의원까지 가세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진 새 모습으로 출범 1주일을 맞은 113대 의회에선 그러나 별로 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112대가 여러 측면에서 이미 바닥을 쳤으니 이젠 나아질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보다는 더 악화될 수도 있다는 징조가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오바마의 역사적 당선과 함께 민주당 천하의 111대 의회가 출범하던 4년 전, 그리고 티파티 돌풍 속에서 공화당 하원시대가 열린 112대 의회가 첫 발을 내딛던 2년 전의 이맘때엔 그래도 워싱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단어가 (설사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해도) ‘초당적 타협’이었다. 올해는 그마저 듣기 힘들다.
개원초의 밀월은커녕 요즘의 워싱턴은 일견 살벌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긴 새 의회가 직면한 현안들엔 새 이슈가 거의 없다. 최악의 당파대립을 초래해 온 낡은 과제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큰 난제가 ‘절벽(cliff)에서 천장(ceiling)으로’ 바뀌며 앞으로 몇 달 치열하게 전개될 예산전쟁이다. 새해벽두의 1차전을 끝내고 절대 질 수 없다는 2차전에 대비하느라 공화·민주 양측의 칼 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재정절벽 협상에서 부자증세를 ‘양보’했다고 믿는 공화당은 부채한도를 상향조정할 2차전에선 증세 없는 대폭삭감을 강행할 것을 다짐하며 또 한 번 국가 채무 불이행사태(디폴트)를 볼모로 삼겠다고 위협한다. 두 번 다시 ‘디폴트 볼모’는 허용치 않겠다고 천명한 민주당도 부유층과 기업의 절세혜택 폐지로 추가 증세를 도모하는 한편 메디케어와 소셜시큐리티에선 약간의 제한도 거부하고 있다.
의회의 격한 대립은 또 한 번 전국적 조명을 받을 것이고 조명 속에 드러나는 추한 싸움에 여론은 의회를 향해 새삼 진저리를 칠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되풀이 할 것인가.
장기적이지만 가장 근본적 대책의 하나가 연방의회 선거구 재조정이다. 의회 기능마비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 국익에 앞서 당론을 우선시 하는 이념의 대결이다. 의원들의 당선 여부가 본선이 아닌 당내 경선에 달렸기 때문이다. 선거구를 각 주 의회에서 정치이익에 맞게 민주당과 공화당 지역으로 구획해 놓았기 때문에 경선에서만 승리하면 본선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요즘의 의회선거다. 초당적 합의를 모색하느라 ‘중도파’로 찍힌(?) 현역의원은 다음 경선에서 이념 선명한 당내 도전자에게 참패당하기 십상이다.
최근의 캘리포니아처럼 선거구 재조정을 주 의회가 아닌 초당적 독립위원회에 맡기는 주들이 늘어가고 있기는 하다. 독립위가 재조정한 선거구는 초당적 표밭이 될 것이고 이런 표밭에서 당선된 의원들은 재선을 걱정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당론보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중도에 설 수 있으며 이런 의원들이 늘어나면 자연히 의회의 양극화는 완화될 것이다.
물론 먼 이야기다. 이번 435개 하원 의석 중 11월 본선 싸움이 치열했던 곳은 수십석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양당의 경선에서 이미 당선여부가 판가름 났다는 뜻이다. 앞으로의 예산싸움에서 절대 양보 없는 혈투를 다짐하며 “난 전국 여론엔 별로 상관 안한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 지역구의 여론이다”라고 말한 아칸소 주 공화당 하원의원 팀 그리핀의 솔직한 심정을 대부분 의원들이 공감하는 게 아직은 의회의 현실이다.
113대 의회가 개원한 직후 실시한 퍼블릭폴리시폴링(PPP)의 여론조사 결과가 8일 발표되었다. 의회 호감도가 9%로 여전히 낮다는 사실보다 눈길을 끈 것은 일상에서 겪는 혐오스런 대상에 대한 호감도와의 비교였다. 몸서리 쳐지는 바퀴벌레보다, 너무 끔직하다는 대장 내시경 검사보다, 정말 짜증난다는 교통체증보다 의회 호감도가 더 낮았다.
‘우리의 의원님’들이 각자 한번쯤 “의회가 바퀴벌레보다 더 싫다”는 치욕적 수준의 혐오감 이면의 민심을 진지하게 되새겨 본다면 새 의회엔 새 희망이 조금씩 생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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