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퀸즈칼리지 화학과 교수·재미과학기술자협회)
유행을 따르는 것은 쉬워 보인다. 말 그대로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비슷하게 하면 된다. 하지만 막상 하려면 어렵다. 다르게 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유행이 나보다 앞서 스쳐 지나간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기 쉽다. 유행을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손실이 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유행을 앞서가는 것이 중요하다. 항상 모험이 따르지만 성공하면 큰 이익이 따른다. 실패하더라도 어차피 실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손실을 최소화 하는 것이 쉽다.
과학에도 유행이 있다. 시류적인 요구가 있던지 새로운 물질이나 현상이 발견되면 사람들의 관심이 커진다. 이러한 관심은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을 낳고 그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발견들은 투자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증폭의 사이클이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과학연구에도 버블 현상 혹은 새로운 발전이 더디어지는 침체기에 돌입된다. 전자의 경우엔 연구의 진실성이 상실되고 후자의 경우엔 연구를 정당화하기 힘들다. 따라서 과학기술에 있어서 현재의 유행에 편승하기보다는 미래의 발전가능성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새로운 유행을 창출해낼 수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례로 나노사이언스를 들 수 있다. 1900년대 말기나 2000 년대 초기에는 ‘나노’라는 말 자체만 들어가도 앞서가는 느낌을 주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과대포장도 많이 있었다. 중요한 발전들이 이뤄졌지만 기대만큼 혁명적인 결과들이 아직 나오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최근에는 나노를 통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검증하는 노력들이 많이 이뤄지고 있고 그 과정 중에 나노는 전통적인 과학들의 일부로 편입되어가는 경향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미래 융합과학기술’을 많이 언급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존의 분리된 과학과 기술 분야들을 접목하고 새로운 형태의 과학 혹은 과학기술을 만들자는 뜻인 듯하다. 분명 중요한 점이지만 공허하고 막연한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좀 더 곰곰이 생각하면 그렇게 새로운 용어도 아니다.
현대 문명의 발전 역사를 보면 과학과 기술의 상호 보완적인 영향력은 새로운 분야를 낳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과학이나 기술 분야의 전통적이고 독립적인 연구 결과가 뜻하지 않게 다른 분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즉 참된 융합과 변형은 자연적으로 이뤄져야지 그러지 않으면 피상적이고 정체불명의 것이 되기 쉽다. 소위 말하는 퓨전음식이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음식으로 잊혀지는 것이 다반사이듯 지나치게 융합을 강조하다 보면 근본 없이 사라지는 연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근본적인 연구에 투자하고 그를 위한 인적자원을 배출하는데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요즈음 한국 기업들과 정치적인 위상의 발전은 그 어느 때보다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한다. 하지만 과학 기술을 주도하는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한국인들의 위상은 미미하다. 물론 두각을 나타내고 앞서 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한국 민족의 학습 능력과 열정에 비하면 그 비율이 아주 작은 편이다. 자녀들에게 과학과 기술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것 이외에 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교육에 있어서 유념하고 노력해야 할 세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배우지 않은 것을 스스로 터득하고 완성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시험과 입시 공부에만 전념하다 보면 이러한 능력을 발전시킬 여지가 없다. 둘째, 불확실하고 어려워 보여도 도전하고 끝까지 해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과학자나 첨단을 달리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 안정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사실 큰 모험이 따르는 일이다. 지적인 호기심과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기의 전부를 투자하지 않으면 참된 발전이 힘들기 때문이다.
셋째, 장기적인 안목이 절실하다. 과학에 있어서 진정한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긴 준비와 체계적인 완성을 통해 그리고 검증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세상을 배우고 시류를 이해하면서도 자기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완성하는 것은 능력도 중요하지만 의지와 믿음의 문제가 더 크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러한 힘과 신념을 키워주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시기인 듯하다.
우리가 원하든 않든 인류의 미래는 앞서가는 과학과 기술에 더 크게 의존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러한 변화의 물결을 주도할 역량이 있다. 조금 더 시야를 넓히고 인내심을 갖고 투자한다면 그 역량이 실현되는 것이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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