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일간 1만3,000마일 만행
▶ 열악한 포교현실에 숙연해지고 열정적 포교노력에 숙연해지고
오클랜드 보리사 주지 형전 스님(사진)이 미국(북가주)에 온 것은 2004년 12월이다. 다음달이면 만 8년이다. 형전 스님이 지난 여름 미국일주 만행을 다녀왔다. 만행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형전 스님 와이드 인터뷰를 2차례에 걸쳐 싣는다.
-만행은 언제 어디로 다니셨는지.
△6월25일부터 8월10일까지 총 47일간 다녔다. 운전거리만 총 1만3,000마일이다. 버클리에서 출발해서 오레곤주를 거쳐 시애틀을 지나서 방향을 돌려 동쪽으로 향했다. 보름정도 걸려서 보스톤에 도착했다.
다시 방향을 틀어 뉴욕을 지나 워싱턴DC를 거치고 플로리다 보현사에서 미국의 가장남쪽을 알리는 키웨스트를 지나서 방향을 잡아서 뉴올리언스 주경계가 500마일을 넘는 텍사스를 지나서 유타를 지나 아리조나주 네바주를 지나서 다시 켈리포니아주로 돌아왔다.
요세미티를 거쳐 레익타호를 둘러보고 리노 보리사를 지난 다음에 다시 보리사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그러니 미국을 원을 그어 한번 돌고 온 셈이다. 긴긴 여정이었다.
-만행을 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
△미국에 올 때부터 가지고 있는 꿈같은 것이었다. 세계에서 작지만 큰 한국땅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을 건너와 한번쯤은 살고 있는 나라를 한번 돌아보고 싶었다. 다시금 살아온 미국의 8년 이민생활을 돌아보고 미주포교를 하고 있는 한국사찰들을 직접 방문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방대한 미국을 느끼고 마치 달마가 인도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동쪽을 오듯이 I-90 타고 다니면서 불교전파의 길을 느끼면서 다녔다.
자연과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강원(승가대학) 도반, 동갑이어서 마음이 통하는 두 스님들과 함께 세명이 다녔다. 많은 대화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싶은 기회를 갖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좀더 이해하고 싶었다. 사람은 자연 환경에 따라 많이들 달라진다. 좀 더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미주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보고 싶었고, 포교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님들을 통해 자기반성을 하고 싶었다.
-인상깊게 느끼신 것은.
△시애틀은 여름이 참으로 긴 곳이다. 저녁 9시반이 되어도 낮이다. 여행자에게 꿈같은 곳이다. 거기서 서미사 스님을 만났다. 1980년대부터 포교 활동을 하고 있는 일면 큰스님은 삶과 수행에 대해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불사에 대한 조언을 듣고왔다. 당신도 이 같은 만행을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시면 부러워하셨다.
시카고 불타사에서 부처님 법을 전파하는데 나이에 상관이 없이 열정으로 뭉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왔다. 좀 더 불자들에게 다가가는 포교 현장에서 따뜻한 기운을 느끼고 왔다. 뉴욕 원각사에서는 밖에 조성된 큰 청동부처님을 뵈옵고 느끼는 감사함은 이로 말할 수 없다. 우리 포교의 원력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바다끝에 있는 것 같은 플로리다 보현사는 여유로움이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엄숙해졌다.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미국,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는 것이 참 다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행을 통해 미국포교의 가능성과 대안에 대해 느끼신 점이 있다면.
△다시한번 간다면 우리나라 사찰뿐 아니라 다른 문화의 사찰도 방문하면서 그들의 포교 방법을 함께 나누고 싶다. 아직은 시작에서 첫발을 디디고 있는 미주의 한국불교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고 생각했다. 세대별 포교방법을 연구하고 좀더 젊은 불교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객관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8년의 포교 활동에 시련이 있었지만 이번 만행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왔다. 가장 기본적인 사찰 부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고 왔다.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현재 미국의 포교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사찰에서는 1명의 주지스님 원력으로 이루어졌는데 좀더 많은 스님들이 함께 하는 사찰이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왔다.
스님들이 상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쉽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찰 주지스님들에게 듣고 왔다. 아직은 너무나도 열악한 미주 한국불교의 현실에 통탄했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서도 스님들의 원력으로 조금씩 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고 왔다. 그래서 가능성이 보인다.
아직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지만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사찰이 되고 각각의 위치에서 서로 협조해야 하고 사찰일도 보다 체계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왔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대한 인수인계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사찰의 주지스님이 혼자서 하고 있고 그도 나이가 드시는데 아직 그 원력을 이을 스님들이 없다는 것, 이것이 제일 큰 문제이지 않나 싶다. 이민 1세에서 2세와 3세의 대물림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그래야 앞으로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을까? 그리고 스님들도 그 고민을 하고 있는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새 교육을 받은 젊은 스님들이 새롭게 포교 현장에서 뛰고 있다는 것, 그것도 희망이 보이는 부분이었다.
그 스님들의 원력을 도와 함께 살아가는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고 있는 스님들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나에게는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시카고 불타사 등 다른 지역 한인사찰도 둘러보셨는데 그런 곳 사정은 어떤지. 북가주 한인사찰들과 비교해서 같은 점 다른 점은 무엇인지.
△앞에서 몇가지 거론했듯이, 제일 먼저 방문한 시애틀 서미사는 정말로 미국의 서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다. 건축 양식이 한국 전통 그대로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부처님 공간 이었다. 그런데 주지스님 혼자서 도량 정리를 하고 있고 함께 있을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대교체가 필요한데 원력이 큰스님만큼 큰 스님의 인연을 아직 못만난 듯했다. 30년의 세월이 그 도량의 평안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큰스님이 주석을 하고 계셔서 안정적인 부분은 있었지만 변화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세인트루이스 부다나라(불국사)는 지금 한인들이 많이 있는 애틀란타에 불사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참으로 바빠 보였다.
지금 있는 불국사는 백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 모든 법회 활동이 조심스럽게 이어가고 있었다. 매주도 아니고 격주로 법회를 보고 있고 조용히 기도와 참선을 하고 있었으며 현지인을 위한 포교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백인 제자가 출가를 하여 한국에서 강원 교육을 받고 있다고 했다. 사찰 안에서는 된장, 김치 등 자극적인 한국 음식의 요리를 금하고 있었다. 그만큼 미국 현지인을 위한 공간을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다.
가늘고 길게 살자는 유머도 나누었다. 이웃집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스님은 동네 반창회도 참석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포교를 할 때 제일 먼저 이웃부터 해야 하는 말을 강조하셨다. 시카고 불타사는 현지 한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 현 주지스님이 부임을 하면서 문화적인 부분을 함께 해서 젊은 불자들이 모이고 여느 교회의 파워를 이길 정도로 안으로 밖으로 스님의 활동이 대단했다.
현 건물이 오래되어 수리를 하면서 옆 건물을 사서 불자들의 공간을 확실히 넓혔다. 공간의 여유가 있고 한글학교, 예술단 운영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보스톤 문수사는 하버드 대학에서 1시간 정도 남쪽으로 떨어져 있었다. 세채의 건물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 주지스님이 포교 현장 앞에서 활동하시고 뒤 건물에는 객스님들의 공간도 가지고 있으며, 회주스님이 그 중심을 잡고 있었다. 공양주도 있고 부목도 있는 등 이번 만행에서 제일 많은 대중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안정되어 보였다.
뉴저지의 원적사는 교회 건물을 사서 개조해서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지만, 많은 보수가 필요했다. 새로운 주지 스님이 30대 젊은 스님이니 그 희망이 보였다. 처음보다 젊은 신도들이 많이 온다고 하니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그렇지만 아직도 스님들은 미국 적응기였다. 뉴욕의 원각사는 넓고 넓은 도량을 보니 마음이 덩달아 넉넉해 보였다.
그런데 대중이 주지스님 혼자 있느니 두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도시에서 떨어진 확 트인 공간이다 보니 좀더 도시 포교와는 다른 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주지스님을 도와 함께 이룰 대중 스님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너무나도 많은 불사의 과제가 남아 있었다. 불사가 완성대면 대도량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필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다. 플로리다 보현사는 참으로 조용한 사찰이었다.
일요일 오후에 도착했는데 주지스님은 한국에서 참선 수행 중이시고 총무스님이 소임을 보고 있었다. 조용하게 늘어선 마을끝쪽에 위치한 보현사는 꽤 넓은 주차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찾아오는 스님들이 적다고 한다. 미국 남쪽으로 치우친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다음에 간 사찰이 텍사스 휴스턴 남선사였다. 아직은 주지스님 없이 재가자들이 절을 세웠는데 한국에서 스님들이 오랫동안 적응을 못하고 돌아가서 스님들 없이 비워진 세월이 오래라고 한다.
요일을 달리해서 미국인들이 와서 참선을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건물은 한인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번듯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포교 원력이 큰 스님이 찾아와 어서 이 땅에 부처님 법 전하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왔다. 신도회장이 사찰을 총괄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를 들어와서 제일 먼저 머문 절이 바로 태고사이다. 무량스님이 세운 이절은 벌써 6번째 참배를 했다. 새롭게 젊은 주지스님이 부임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오셨다고 하니 안심이 되었다. 자연 환경이 열악한 태고사이지만 전통 사찰 양식에 선방에 앉아 한국을 그리워할 수 있었다.
엘에이 선각사는 우리 보리사처럼 렌트를 내고 있는 절이다. 겉에서 보기와 달리 들어가면 주차공간이나 법당이 꽤 넓은 편이다. 4,000SF 넓다고 하니 부러웠다. 여기는 주지스님이 한의사를 하고 있어 신도들이 아프면 치료도 해주고 있었다. 노보살님이 두분 오셔서 주무시고 가는데 거주하지는 않고 법회 있기 전에 와서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30대 주지스님이 내가 미국에 있는 시간과 비슷하게 머물러서 불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코리아타운에 위치를 해서 장소의 용이함이 있으나 앞으로 불사가 창창해 보였다. 금강선원 주지스님도 잠시 와서 머물고 가시는 등 주지스님이 객에게 넉넉하셨다. 한인들이 많이 있는 코리아타운에 위치를 하고 있고 스리랑카 스님이 청소년 법회를 보고 있었다. 가든그로브에 위치한 정혜사는 새롭게 교회를 사서 불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부채가 많아서 주지스님이 힘들어 하지만 한글학교가 나이별로 잘 되어 있었다.
청소년부를 비구니스님이 맡고 계셨다. 대중스님이 몇분 더 계신 것 보니 역시 승가대중의 힘이 컸다. 법왕사는 30년 그 자리에 있었단다. 약속을 하지 못해서 들어가 참배를 할 수 없었다. 멀리서 그냥 합장 반배만 하고 돌아왔다. 미주 한국 사찰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우리 북가주 사찰의 열악한 포교 현실에 고개가 숙여졌다.
건물이 제일 문제이겠지만, 승가 대중이 절실히 필요했다. 30년 이상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포교활동은 비례하지 않았다. 비구니보다 비구스님이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북가주는 주지소임을 비구니들이 이제 반을 넘어섰다.
<계속-정태수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