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당 소속의 전, 현직 대통령은 최소한 ‘정치적 아군’으로는 믿어도 될 것이다. 42대 전직과 44대 현직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그들 -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를 절친(bromance)
으로 여긴 적 없고 사실 별로 가깝지도 않지만 서로가 결코 적은 아니다.
그런데 지난주 공화당 전국위원회에서 뿌린 보도자료엔 이런 제목이 달려있었다 : “부바(클린턴)가 오바마를 작살내다…또다시!” 보수언론 폭스뉴스도 외쳐댔다 : “클린턴, 공화당의 동지로 떠오르다”
오바마 재선을 위해 꾹꾹 눌러두어야했을 속마음을 클린턴이 TV에 털어놓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공화당에게 신나는 한마당을 선사한 것이다.
‘취임 후 최악의 한 주였다’는 워싱턴정가의 호들갑은 과장일지 몰라도 지난주 내내 오바마에게 불길한 악재들이 겹친 것만은 사실이다.
대선경제의 바로미터라는 실업률은 다시 올라갔고, 민주당 지원세력 노조가 앞장 선 위스콘신의 공화당 주지사 소환선거는 패배했으며 미트 롬니의 선거모금액이 처음으로 오바마를 넘어섰는가 하면 지지율까지 상승세를 보였으며 실업률 증가의 파장을 막으려고 준비한 기자회견에선 오바마 자신이 아차, 실언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공공부문 부양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한 나머지 “민간경제는 잘 굴러가고 있다”고 언급, 회복세는커녕 여전히 허덕이는 서민의 처지를 간과한 셈이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민심과 거리 먼 대통령”이라는 공화당의 공세 속에 시작된 이번 주도 쾌청은 아니다. 법무장관은 자료제출을 안했다고 의회모독 피소위기에 처했고 남가주에서 교통사고를 일으킨 상무장관은 뺑소니 혐의로 월요일 아침 뉴스를 장식했는가하면 연준의 보고서는 중산층 자산의 충격적 감소를 외쳐댔고 월가의 돈이 롬니에게 몰리고 있다는데 어제는 카지노 거부가 롬니 수퍼팩에 1천만 달러를 기부한다는 소식까지…
잇닿는 악재의 와중에서 사소한듯하면서도 개운찮은 여운을 남기는 것이 클린턴과의 엇박자다. 오바마 캠페인 핵심주제들과 대치되는 의견을 계속 공개표명한 후 해명하고 사과하는 클린턴의 해프닝은 2주전부터 시작되었다.
롬니가 CEO로 이끌었던 베인캐피탈 회사를 ‘흡혈귀’에 비유한 오바마진영의 TV광고가 방영된 직후, CNN 토크쇼에 출연한 클린턴은 이 같은 공격을 문제 삼으며 “롬니는 ‘훌륭한’ 비즈니스 경력을 갖고 있다”는 찬사까지 바쳤다. 오바마측의 불편한 심경은 즉각 클린턴에게 전달되었고 닷새 뒤, 오바마와 동행한 뉴욕의 모금파티에서 클린턴은 며칠 전의 ‘실언’을 만회하려는 듯 롬니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미국과 세계의 재앙”이라고 필요이상의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클린턴의 엇박자는 재연되었다. 이번엔 CNBC와 인터뷰에서 부유층까지 포함해 부시감세에 대한 잠정적 연장을 촉구한 것. 부유층 증세를 역설하는 오바마의 메시지와는 정반대였다. 오바마 진영의 분노는 부글부글 끓었고 클린턴 사무실엔 민주당 인사들의 전화가 쇄도했다.
결국 클린턴 자신이 CNN을 통해 “아이 앰 베리 쏘리”라는 사과로 일단락 지었지만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린 클린턴 보좌관들 중 한명은 “그분이 아직 샤프하긴 하지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라 현장감이 좀 떨어지지요, 65세인 걸요…”라고 둘러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시대 ‘가장 스마트한 정치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클린턴이 자기 발언의 의미나 파장을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 정가의 대체적 시각이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월스트릿에 대한 개인적 호감? 오바마에 보내는 경고? 2016년 힐러리 대선출마 위한 터 닦기? 오바마의 재선 입지가 흔들리면서 불안해진 민주당 일각의 분열을 알리는 신호? 배타적인 오바마 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표출? 네거티브 캠페인을 지양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정책대결로 방향을 바꿔야한다는 클린턴의 소신표현? 온갖 분석들이 믿거나 말거나 난무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제임스 카빌 등 클린턴의 천재적 선거참모들이 ‘경제메시지의 내용을 바꾸라’고 제안한 전략메모도 12일 공개되었다. 골자는 간단하다 :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아무도 안 믿는다. 앞으로 경제를 좋아지게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미래’에 집중하라.
클린턴과 90년대 캠페인 천재들의 충고를 콧대 높은 오바마 팀이 얼마나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오바마 캠페인은 클린턴을 결코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같은 위험부담은 상존하지만 쓸모가 꽤 많은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엔 등 돌려도 클린턴의 전화엔 지갑 여는 돈줄 인맥 풍성한 모금의 귀재인데다 지지도 66%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 복잡한 이슈를 쉽고 설득력있게 정리해주며 부동층을 끌어들이는 유세장에서의 호소력, 오바마팀이 고전 중인 무소속과 백인 근로계층에서의 높은 지지율…몇 주 사이 갑자기 사면초가에 빠진 오바마에겐 하나하나가 너무나 절박하게 아쉬운 요소들이다.
‘경제에 성공한 대통령’ 클린턴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앞으로도 엇박자를 막기 위한 오바마팀의 통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요즘 워싱턴에서 나돈다는 조크 한 토막 : “그를 초대하면 좋은 클린턴이 올지 나쁜 클린턴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좋은 클린턴만 올 수 있도록 오바마의 행운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11월6일 대선까지 이제 145일 남았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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