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오는 영세 노인이민자들은 대부분 생면부지의 ‘미국효자’를 만난다. 자기를 초청해준 혈육보다 효도가 더 극진하다며 흐뭇해한다. 아들도 잘 안주는 용돈을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는 이 효자는 사람이 아닌 연방정부다. 미국에 세금 한 푼 낸 적이 없지만 두말없이 생계비를 보태준다. 금액도 한국에선 좀체 만지기 어려울 정도로 두둑하다.
요즘 그 효자가 자꾸 눈치를 보인다. 돈줄인 사회보장(소셜시큐리티: SS) 신탁기금이 빠른 속도로 메말라들기 때문이다. 은퇴·생존자 보험(OASI)과 장애자 보험(DI)을 운용하는 전체 SS 신탁기금(OASDI)은 특단 구제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21년 후인 2033년에 ‘소진’될 전망이라고 SS 당국이 이번 주 발표했다. 작년 발표보다 3년이 앞당겨졌다.
‘소진’은 바닥이 완전히 들어나서 은퇴자들에게 연금을 한 푼도 못 주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2033년엔 SS세금 수입만으로는 지출액의 75%밖에 감당 못하게 돼 연금 지급액도 25% 줄어들게 되며 그런 역조현상이 그 후 75년간 이어진다는 얘기다. OASDI 전체 지출액은 이미 2010년부터 SS세금 수입을 웃돌기 시작했다. 1983년 이후 처음이다.
SS 신탁기금이 빠르게 고갈되는 큰 이유는 잘 알려진 것처럼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무더기 은퇴 탓이다. 제2차 대전 후 1946년부터 1964년까지 18년간 이어진 출산 붐 속에 태어난 미국인들이 매일 1만여명씩 65세가 돼 SS 연금 신청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이 은퇴하기 전에 낸 SS세금 수입은 줄어든 반면 이들에게 지급되는 연금은 늘어난다.
SS 신탁기금의 소진이 3년 앞당겨진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자마자 미국 최대 노인권리단체인 미국은퇴자협회(AARP)가 성명을 내고 정부당국과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국민 대화의 장’을 마련해 대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이미 은퇴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보다도 앞으로 40~50년 후 은퇴하게 될 후손들의 생계를 보장하라는 얘기이다.
소셜시큐리티는 1930년대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5년 시행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창설됐다. 실업자 홍수에 굶어죽는 노인들이 속출하자 정부는 모든 근로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은퇴연금제도를 만들었다. 근로자들이 봉급의 일부를 소셜시큐리티 기금에 납입해 최소한 은퇴 후 굶어죽는 비극은 막자는 것이 취지였다.
그 후 SS는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권자 그룹을 탄생시켰다. 연금을 받는 은퇴자와 곧 받게 될 예비 은퇴자들이다. 사회의 중진이요 중견이다. 이들은 소셜시큐리티 개혁을 운위하는 정치인들을 곱게 보지 않는다. 그래서 SS는 정치인들 사이에 지하철의 ‘제 3 궤도’로 불린다. 전기가 통하는 이 궤도에 손댔다가는 비명횡사한다는 뜻이다.
SS 개혁이 시도되지 않은 건 아니다. 근로자들이 SS에서 자진 탈퇴해 직접 주식시장에 투자하도록 허용하자는 제안이 부시 행정부 때 나왔으나 의회에서 흐지부지 됐다. 오바마 행정부도 SS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대통령 선거의 해인 올해는 슬그머니 넘어갈 전망이다. 5,500만명이나 되는 SS 연금 수령자들의 표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대부분 자영업에 종사하는 탓인지 SS 은퇴연금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듯하다. 미국정부의 효도를 즐기는 영세 한인노인들도 아직은 느긋하다. 자기들의 용돈 출처인 OASI가 앞으로도 21년은 현재 수준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DI(장애자 보험) 수혜자는 좀 다르다. 당국은 DI 신탁기금이 4년 후인 2016년 소진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베이비부머’들이 비슷한 황혼낙조를 겪고 있다. 한국동란 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물밀듯 태어난 세대들이 은퇴하기 시작했지만 미국처럼 SS 혜택이 없다. 이미 뒤주가 바닥났을 뿐 아니라 미래의 뒤주를 채우기 위해 손댄 창업자금도 빚에 의존해 허덕인다는 소리가 들린다. 잔인한 4월은 끝났지만 잔인한 소식은 끝나지 않고 있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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