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박물관 하나인 대영박물관, 전부 타국의국 보급보물들 떨떠름
랜드마크인 시계탑 빅벤은 첨단시대에도 손으로 태엽 감아 작동시켜
<런던 편>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 자신만의 사막에 별똥별 하나씩을 안고 살아간다.’ 어느 수필에서 본 문장이다. 유럽구경은 그때 강당에서 사진을 본 이후로 내 별똥별이었다. T. S 엘리엇의 ‘기다림 없이 기다렸다’는 말처럼 ‘언젠가는’ 하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사람에겐 자기만의 삶의 범위가 있는 거니까. 그랬는데 그 여망의 유럽과 만나게 됐으니 실로 꿈같은 일이다.
이번 유럽여행이 성사된 걸 나비효과론에 대입해보면, 애초의 날개 짓은 영화 ‘Leap Year <윤년>’다. 로맨틱한 스토리에다 무대인 아일랜드의 소박한 자연미에 반해 TV영화채널로 보고 또 볼 때였다. 마침 딸애가 다니러 왔기에 함께 또 보게 됐다. 그림 같은 장면에 넋이 나가, 나도 모르게 “아! 아일랜드에 가고 싶다!”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딸애가 들었는지 “엄마! 아일랜드 가보고 싶어?”물었다. “어렵겠지. 아일랜드커녕 영국 프랑스도 못보고 죽을 텐데.”픽 웃으며 농담처럼 말하고 보니 슬며시 비감스럽기도 했다. 이즈음 나이 탓인지 부쩍 삶의 공허감과 초조함에 눌려 허우적거리니까.
용혜원 님의 <나이 탓>이란 시가 있다. 별일도 아닌데/ 갑자기/가슴이 허전함을 느끼며/눈물이 핑 돈다//산다는 게 무얼까/나이 탓이다/살아온 세월이 늘어난 까닭이다. 그런데 몇 주후, 딸애가 ‘Leap Year’ 영화 DVD를 사왔다면서 하는 말이, 한국여행사에서 아일랜드 가는 건 없지만 유럽은 많단다. 자기하고 동생부부가 추진하고 있으니까, 엄마는 무조건 가야한다나. 급기야 애들의 간곡한 권유에, 긴 세월 숨어있던 별똥별이 못이기는 척 빛을 발하게 됐다. 그것도 뉴욕에서 만난 20년 지기인 유 와 이, 여고동창 박, 대학동창 성, 그야말로 네잎클로버인 초록빛 친구들이 9박 10일의 여정 길에 동참한 것이다.
케네디공항에서 밤 9시에 떠난 비행기가 시차로 런던에 내리면 아침 9시 30분이란다. 밤새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필히 자둬야함에도 너무 벅차올라 도무지 잠이 안 온다. 히드로 공항은 협소해보여도 질서정연하고 정갈한 인상이다. Passport Control이라고 쓴 입국심사대에서 미국인, EU가입국, 기타 외국인으로 창구를 분류해놓아, 우대받는 양 금방 통과라 기분 좋다. 생면부지인 곳이라 현지 가이드란 분만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갔다. 일행은 LA쪽 여행사의 김가이드란 분하고 미주 각지에서 모인 26명의 관광객들이다. 날씨는 뉴욕과 비슷해도 심호흡을 해보니 공기 맛은 좀 더 촉촉하다. 영국이라면, 영토가 한반
도와 크기, 모양이 비슷하고, 안개, 우산, 비가 유명하다고,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다. 왕년엔 영토의 100배나 넘는 식민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지금은 세계 5, 6위의 경제대국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비교적 잘 정착된 편인 것.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가 ‘모든 나라들이 영국을 좀 더 닮지 못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는 걸로 알고 있다.
잉글랜드의 한자표기인 영국의 진짜 이름은 ‘대 브리튼 섬’이고, 웨일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로 이뤄진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인 것. 엄밀히 말하면 잉글랜드는 한 지방에 불과한 이름인 셈이다. 고로 모르면 몰라도 지역감정은 우리보다 더 심각할 거라는 것. 그런 관계로 영국인이냐 물을 때, Are you British?해야지, Are you English?하면 싫어한단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가 도로 폭, 차와 집들까지 대영제국답지 않게 대부분 소형이고 구
식이다. 신대륙인 미국의 모든 것들이 규모면에서 얼마나 통이 큰 건지 새삼 인지된다. 자전거들을 몇 십대씩 세워놓은 곳이 많다. 북해에서 양질의 원유가 나오는 산유국임에도 유럽에서 기름 값이 가장 높고, 좁은 구도로다 보니 자전거사랑은 필요불가결이겠다. 그런 공용자전거들이 30분사용엔 무료고 하루 종일 타도 끽해야 2000원이란다. 이용 후에도 사용자가 편리한 보관 장소에 갖다놓으면 끝이고. 자전거사랑을 위해선 권장할 제도다.
지극히 보수적이고 변화를 극구 피하는 영국인들이다보니, 이층버스
, 우체통, 공중전화 박스는 60년이 돼오도록 오로지 빨강색으로 무변동이다. 검은 색만을 고수한 택시도 런던의 상징이 됐다. 영국여왕이 20대부터 86세인 지금까지 머리스타일, 샤넬라인 주름스커트, 모자 등 입성이 한결같은 것처럼. 식당도 간이 분식센터마냥 구조가 비좁다. 영국은 원래 음식이 맛없다지만, 날밤을 새서 그런지 스테이크가 뻑뻑하고 영 안 먹힌다. 첫 관광은 세계최초이자 메트로폴리탄, 루브르와 함께 세계3대 박물관의 하나인 대영박물관이다. 무료관람이라기에 국가대표 급이라 서비스차원인가 했더니, 200개가 넘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다 무료란다. 특별전시인 경우만 빼고.
작은 운동장에 있는 박물관의 첫인상은 소홀히 취급당한다는 거였다. 외벽과 거대한 원기둥들이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채 퇴락한 모습이니까. 그래도 안은 깨끗이 단장돼있고 규모도 대단해 놀랍다. 순 남의 나라 문화재를 약탈해 전시해 놓은 격이라 어이가 없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에서 뜯어온 거대한 대리석, 인디아의 시바여인상 등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것들이, 죄다 타국의 국보급 보물들이다. 국력의 힘자랑과 침략자의 만행이기에 떨떠름하다. 3층 한국 관엔 정자 같은 기와집이 전혀 고풍스럽지 않아, 전시된 도자기류까지 역사성이 얕아 보이게 해 안타깝다. 세계에 불변 두 가지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영국에 왕이 존재하는 거’란 말이 회자된다. 지금시점에선 왕정폐지여론이 급부상했지만, 왕국을 버킹검주식회사라 칭하고 왕족들의 야사가 일일연속극 재미를 능가하니 그냥두자는 여론도 대두됐단다. 와서 보니 버킹엄궁전 덕에 관광소득만큼은 확보겠지만, 내겐 강 건너 불구경일 뿐.
궁전돌담길은 덕수궁돌담길이 연상될 만치 운치 있다. 예상외로 왕궁은 회색빛깔로 호화로움을 비껴간다. 윗부분을 금색으로 도장해 왕궁티를 내긴 했다. 궁전 앞의 빅토리아 여왕 기념관과 기념비 동상도 금도색이다. 권위와 차별성목적하에? 내 눈엔 금색 칠이 별로인데. 유명한 근위병교대식은 여름 외엔 격일제라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다. 얼마 전, 결혼식 후에 왕자부부가 나와 손을 흔들던 발코니도, 영상매체를 통해 전해지던 품격 있던 특별함과 달리, 한낱 아파트의 베란다일 뿐이라 실소가 나온다. 깃대위에서 만국기들이 휘날리는데 태극기는 없기에 가이드님께 물어봤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영연방이 된 호주, 뉴질랜드, 남아연방, 케나다, 말레이시아, 우간다, 스리랑카의 국기만 계양된 거란다. 그런 이유라면 태극기가 빠진 게 백번 좋다. 이런 사안엔 일본의 만행이 떠올려져 유별나게 민감해지고 일본거부반응만 되살려진다.
길을 건너는데 차 운전자가 오른쪽이고 보행방향이 미국과 반대라 어리벙벙하다. 영국여왕이 왼손잡이라 왼손으로 기아변속 하는 차를 고수한다는 말도 있지만. 여하간 나는 83년에, 차 운전자가 오른쪽이던 호주에서 살던 시절로 회귀한 듯 반갑다. 그때 한국에서의 통행습관대로 길을 건너다, 반대방향에서 나타나는 차들 때문에 간 떨어질 뻔 했던 적이 부지기수였다. 애써 호주의 교통규칙에 적응됐을 즈음에 미국으로 와선, 예전 한국식으로 되돌려야해 애 좀 먹었다. 운전감각문제로 인한 자신감결여로 한동안 운전도 안했다. 신호등이 가로등처럼 양편에 있거나, 건너는 보행자신호도 뉴욕과 달리 흰색이 아닌 노란색이다. 버스 앞의 왼쪽 머리에 기역자같이 구부러진 구조물이 달려있어 특이하다. 구조물 아래 네모난 거울이 박혀있는 걸로 보아 옆 거울인가 보다. 우체통도 아주 뚱뚱하고 주입구멍이 두 개다. 왼쪽구멍은 비싸고 빠른 우편물을, 오른쪽 주입구엔 보통 우편물을 넣는단다. 생활문화가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다름의 미학’이라고 생경스럽고 재밌다.
조금 가니까 ‘세인트 폴 성당’이 나왔다. 돔과 건물꼭대기엔 역시 금박치장이다. 점잖은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랑 겉돈다. 유럽에선 가장 크고, 팔각형의 돔은 로마의 베드로성당보다 크다는데 보이지도 않는다. 앞의 도로가 좁은 2차선이고 굽어져서 거대한 건물이 더 가분수로 느껴진다. 아무리 뒤로 물러서도 건물모습을 사진으로 다 담기엔 역부족이니까. 그다음은 템즈강의 조망이다. 황토색의 템즈강은 한강 동생뻘로, 한강이 얼마나 씩씩하고 의젓하게 잘생겼는지 재인식시켜준다. 나룻배들도 선체가 길고 좁은 조정경기용 스타일로 낯설고 좀스럽다. 우리의 나룻배들이 훨씬 포근하고 풍류가 있다.
영국의 상징적인 건물들이 강 건너에 다 몰려있어 한 눈에 척 들어온다. 고딕양식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멀리 고즈넉한 자태로 서있다. 사원 안엔 찰스 디킨스, T. S 엘리엇, 윌리엄 워즈워스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의 묘가 있고, 다이애나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곳이다. 자연히 고적하고 엄숙함이 전이된다. 옆의 국회의사당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적재산권보호법을 제정한 민주주의의 원천답게, 무한한 신뢰와 경외감이 전달된다. 따뜻한 시선으로 안 봐지고 흘기게 되는 여의도 의사당 볼 때와는 구별된다. 건물이 풍기는 인상도, 외관보다는 몸담은 사람들의 소명의식과 행태, 업적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는 게 읽힌다.
랜드 마크인 시계탑 빅벤이 우뚝 솟아있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멋지다. 탑 건축가였던 벤자민 홀의 키가 엄청 컸다고 해서 빅벤이라 부르지만, 공식이름은 ‘세인트 스티븐의 탑’이다. 탑의 높이가 95m, 첨탑이 61m에다 시계 얼굴 직경만도 7.5m인,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고 멋진 시계탑이다. 시계나이가 원체 많다보니 첨단시대에도 손으로 태엽을 감아 작동시킨단다. 국제표준시를 알려주는 종소리는 영국의 TV 와 라디오의 시보이기도 한다나. 우려할 일은 지하철과 지하주차장의 여파로, 북서쪽으로 0.26도 기울어진 채 진행형이라는 거다. 기울기가 4도라는 피사의 사탑에 비하면 게임이 안 되겠지만, 깊게 고민해볼 문제다.
강에 걸린 빅토리아풍 고딕양식의 타워브리지는 명불허전이다. 나중에 국가대표로 자리매김 될 줄은 모르고, 당시엔 모두 디자인을 못마땅해 했단다. 이렇듯 모든 것의 미래평가는 오로지 역사의 몫이다. 다리를 개폐하는 비밀은 동화속의 성 같은 양쪽 두 개의 첨탑에 숨겨져 있단다. 다리 밑으로 선박이 지나가면 수압에 의해 다리가 들리는데, 1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고장이나 실수가 없었다지만, 내 생각엔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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