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의 국정 연설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의무다. 서면 메시지 형식이었다가 1913년 우드로 윌슨 시절부터 연방의회에서의 스피치로 바뀌었다. 1960년대 TV 중계가 시작된 이후 새해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던 뜻 깊은 의식으로 자리 잡았던 국정연설은 그러나 워싱턴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대통령이 ‘까칠한’ 의회에 입법안건 목록을 전달하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다.
대통령이 처한 정치 환경에 따라 국정연설의 비중도 달라진다. 인간의 기본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참전의 당위성을 호소한 1941년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연설은 촉각을 세운 전 국민의 가슴에 가닿았으나 2008년 인기 없는 레임덕 조지 W. 부시의 마지막 국정연설은 뜨거운 대선 열기에 파묻혀 뉴스의 조명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재선에 나서는 현직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 국정연설은 좀 미묘하다. 어쩔 수 없이 캠페인 스피치가 되어 버린다. 레이건도, 클린턴도, 아버지와 아들 부시도 다 그랬다. 설사 ‘사심 없는’ 국정 안건을 제시한다 해도 대선을 앞둔 의회에서 입법화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24일 밤 오바마의 3번째 국정연설도 ‘캠페인 스피치’의 면모가 역력했다. 이라크전 종식의 국제문제로 시작해 교육에서 이민, 에너지, 한미 FTA, 낙농규제완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안건을 두루 짚어가다가 오사마 빈라덴 사살 특공대의 애국적 단합 의지에 대한 찬사로 끝냈지만 포커스는 경제였고 그중 뜨거운 화두는 ‘공정한 사회’ - 바로 오바마 재선에 동력이 될 핵심 이슈다.
에너제틱한 웅변이었다. “살기 힘든 사람들이 늘어나고 점점 소수만이 잘 사는 나라에 안주하든지, 아니면 모든 사람이 공정한 기회와 공정한 몫을 갖고 동등한 룰을 적용받는 경제를 회복시키든지” 선택을 제시한 그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책임을 다하면 보상 받는 건실한 경제(economy built to last) 재건”을 자신의 청사진으로 내놓았다.
실현 방법의 하나로 그는 다시 ‘부자 증세’를 제안했다. 가을 이후 ‘중산층의 전사’로 자처하며 도입을 강조해온 ‘버핏세’에 이번엔 숫자까지 덧입혔다. 한해 100만 달러이상을 버는 고소득자는 최소한 30%의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한 그는 반발할 공화당을 향해 미리 못 박듯 말했다. “이런 걸 ‘계급투쟁’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억만장자에게 최소한 자기 비서 정도의 세율을 적용하자는 것인데? 대부분 미국인들은 그런 걸 ‘상식’이라고 한다”
부자증세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높다. 국정연설 전 뉴욕타임스 조사에선 52%가 버핏세 도입을 지지했고 연설직후 워싱턴포스트가 실시한 온라인 투표에선 82%가 찬성했다.
타이밍도 좋았다. 이날 오전 공화경선의 선두주자 미트 롬니가 2010년 세금보고 내역을 공개한 것. 중산층의 평균 근로소득세가 30% 안팎인데 비해 2,170만 달러를 벌어들인 롬니의 세율은 워런 버핏의 17.4%보다도 낮은 13.9%였다. 오바마는 롬니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참패당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을 앞둔 96년 국정연설을 통해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해 민주당 아닌 공화당의 갈채를 받았다. 그는 공화당과의 초당적 타협을 도약대로 삼아 재선에 성공했다. 반대로 오바마는 “국민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에 한해선 정부가 도와야 한다”는 링컨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정부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바마가 이날 공정한 경제사회 실현을 위해 제안한 아이디어는 다양했다. 국내 일자리 창출 제조업 세금혜택에서 커뮤니티 칼리지와 기업간 인력양성 파트너십, 모기지 재융자 확대, 대학 등록금 인하, 녹색 에너지 개발, 금융범죄 단속부서 신설, 교육개혁에 이르기까지…모두가 정부의 지원 프로다. 가을 표밭에서 ‘큰 정부’ 논쟁이 부자 증세 못지않게 뜨겁게 달아오를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지난 몇 년 공화당이 필사적으로 반대해온 대표이슈를 국정연설이라는 파워플한 연단을 통해 재선의 핵심 공약으로 공표했으니 선거까지 앞으로 9개월, 공화당 하원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제안한 정책의 대부분이 의회에서 죽어버릴 것을 알고 있겠지만 오바마는 전의를 숨기지도 않았다 - “난 어떤 방해에도 맞서 싸우겠다” 말로는 국익 위한 단합과 협조를 강조했지만 어조는 강경하고 공격적이었다.
지난여름까지 애걸하듯 공화당과의 ‘초당적 타협’에 매달렸던 오바마가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후 가을부터는 전략을 바꾼 것이다. ‘아무것도 안하는(Do-Nothing) 의회에 대한 공격 개시에 나섰는데 이후 여론의 지지율이 상승세로 돌아섰다. 경제지표에도 미미하지만 청신호가 켜졌고 무엇보다 지리멸렬한 공화당 후보군이 오바마 진영에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에서 강한 비판이 쏟아졌으니 ‘성공적’ 국정연설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거부하기 힘든 화두를 효과적으로 부각시켰으니 캠페인 스피치로는 ‘성공적’이다. 자신의 신통치 않은 경제 대책에 대한 ‘심판’에서 ‘부자들의 대변자’와 ‘중산층의 수호자’간의 ‘선택’으로 일단 본선의 프레임도 새롭게 다져놓았다.
대통령은 당장 연설 다음날 경합지역 5개주 순방에 나서 ‘공정한 경제’ 홍보에 들어갔지만 영향력이 얼마나 지속될 지는 미지수다. 부자들의 세금을 올리고 정부가 공동선을 위해 적극 개입하면 서민들이 살기 좋은 공정한 사회는 실현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앞으로 9개월 동안 우리 각자가 찾아내야 한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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