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우스캐롤라이나 로컬 TV방송국의 광고담당자들은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이 불황에 소화가 힘들 정도로 광고가 밀려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21일 공화 대선 프라이머리를 겨냥한 선거광고다. 정상 광고료의 2배를 받는데도 멈출 기세가 아니다. 이처럼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정치광고의 홍수는 주 사상 처음이다.
로컬뉴스에 배당된 7~8분 광고 시간 중 이번 주엔 6.5분이 선거광고로 채워질 예정인데 “시청자들이 지겨워할까봐” 재편성을 고려중인 방송국도 있다. 선거를 일주일 앞둔 지난 주말에 이미 2008년 경선의 광고규모를 훌쩍 넘어섰다. 광고만 늘어난 게 아니라 온갖 인맥을 총동원해 인기프로에 편성해 달라는 청탁까지 쇄도하고 있다. 가히 정치광고의 ‘융단폭격’이다.
예년 대선에서도 TV광고 전쟁은 캠페인의 주요부분이긴 하지만 금년은 특히 심하다. ‘수퍼팩’ 덕분이다 : 수퍼 정치행동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가 2012년 미 대선의 돈 싸움 대리선수로 등장한 것이다. 수퍼팩은 2년 전 연방대법원의 선거자금법 관련 판결결과로 새로 탄생한 막강한 캠페인 조직이다.
미국인 개인이 한 대선후보에게 기부할 수 있는 돈은 최고 5,000 달러다. 그것도 예선과 본선, 2개의 선거로 나눠 각각 2,500달러씩이 개인 기부금의 법적 상한선이다. 그런데 2010년 연방대법의 판결로 그 상한선이 무의미해져 버렸다. 당시 ‘시민연합 대 연방선관위’ 소송에서 대법원은 선거결과에 영향을 주는 기업과 노조의 기부를 금지시킨 연방법이 “표현의 자유에 어긋난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해집단의 정치지원 길을 열어준 것이다.
부유한 개인이든 기업과 노조든 후보에게 직접 돈을 기부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를 지지하는 수퍼팩에 주면 된다. 수파팩은 누구로부터 어떤 큰돈도 받을 수 있다. 무제한으로 돈을 받아 어떤 특정 후보의 지지를 위해, 혹은 반대를 위해 그 돈을 무제한으로 쓸 수도 있다. “독립적이어야 하며 지지 후보와 직접적으로 협조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전제조건일 뿐인데 대표적 수퍼팩은 각 후보의 전직 참모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다.
미국의 정치자금제도는 투명하다. 누가 얼마를 기부했는지, 그 돈이 어디에 얼마나 쓰였는지 모든 내역이 공개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세기만 해도 철도와 철강 등 각계의 재벌들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대가로 정치에 압력을 행사했다. 기업의 정치후원 규제는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 시작되었다. 71년 연방선거운동법이 제정되었고 그 후 두 차례에 걸친 수정법을 통해 선관위가 설립되었으며 2002년에는 기업의 지나친 영향력 행사를 차단하려는 초당적 선거자금 개혁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민주주의의 근간인 ‘공정한 선거’를 위한 부단한 노력의 100여년 과정이었다.
요즘 선거판의 수퍼팩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기세가 팔팔하다. 엄격한 규제에 묶였던 손발이 풀린 ‘큰손’들이 풀어내는 ‘큰돈’으로 무장했으니 거칠 게 없다. 지난 가을 이후 공화경선의 광고지원으로 이미 4,000만 달러가까이 지출되었고 본선이 시작되면 5억 달러 이상이 뿌려질 것이라고 타임지는 추산한다.
수퍼팩의 요긴한 기능은 후보를 대신한 악역 담당이다. 후보 자신처럼 ‘이미지’ 손상을 염려할 필요가 없으니 무자비한 상대 인신공격에도 용감하다. 최대 피해자가 아이오와에서 지지율 1위로 올라섰다가 롬니 지지 수퍼팩에게 난타당하며 추락한 깅리치다. 지금까지 나온 수퍼팩 네거티브 광고의 96%가 깅리치 때리기였을 정도다.
라스베가스 카지노 거부로부터 500만 달러를 기부받은 깅리치 지지 수퍼팩이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설욕전으로 롬니 때리기에 집중하고 있지만 효과는 아직 신통치 않다. 기업합병회사 ‘베인 캐피탈’로 더욱 부자가 된 롬니를 일자리 빼앗은 ‘냉혹한 기업사냥꾼’으로 몰아가는 전략이지만 “깅리치의 정치는 무모하고 혐오스럽다”는 롬니 수퍼팩의 역공에 밀리는 형국이다. 하긴 기업의 대변자인 공화당의 후보가 월가점령 시위대처럼 주장하니 아무래도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러나 ‘베인 논쟁’으로 롬니의 부를 이슈화시킨 것만은 확실하다. 롬니가 최대 강점으로 자부해온 기업 배경을 방어해야 할 약점으로 격하시켰으니까. 자유경쟁 자본주의를 기본 가치로 강조하는 공화당의 경선에선 롬니에게 큰 타격을 안줄 것이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빈부격차를 미국의 당면문제로 꼽는 무소속 유권자들이 좌우할 본선에서는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중산층 근로자보다 훨씬 낮은 15% 세율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억만장자 롬니의 세금문제가 엊그제부터 핫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역시 롬니는 99%와 공감하기 힘든 1%였다!” : 롬니가 엄청난 부자인 것도, 자본이득세율이 15%인 것도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보다 감성이 우선하고, 사실보다는 이미지가 강하게 어필하는 것이 선거의 속성이다. 롬니의 수퍼팩은 이번엔 어떤 메시지를 들고 진화에 나설 것인가.
금년 선거는 수퍽팩의 위력을 가늠하는 첫 대선이 될 것이다. 대법원의 보수신념처럼 ‘표현자유’를 강화하는 순기능을 할 것인지, 특수집단의 이해가 걸린 ‘돈 선거’로 되돌아가는 길을 닦아줄 것인지, 불분명했던 수퍼팩의 정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무대가 될 것이다. 열 달 후 “부자들이 후보에게 돈 보따리 건네기가 훨씬 쉬워졌다”는 선거분석이 나오지 않기를…기대하자.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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