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취임 후 첫 ‘새벽 3시’ 비상전화를 받게 한 장본인은 김정일이었다. 백악관 입성 넉 달 만인 2009년 5월24일 북한은 기습적 핵실험을 감행, 메모리얼데이 연휴를 즐기던 미국의 허를 찔렀다.
경력이 일천한 젊은 대통령 오바마의 약점은 2008년 캠페인 당시부터 ‘안보’였다. 민주당 경선의 라이벌 힐러리 클린턴이 이점을 꼬집은 TV광고가 압권이었다 : “어린 자녀들이 깊은 잠에 빠진 새벽 3시, 세계적 위기를 알리는 백악관의 비상전화가 울릴 때 당신은 그 전화를 누가 받기 원하는가” 그후 ‘3 a.m. call’은 지도자의 국제사태 대처능력 시험대를 뜻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첫 시험대를 무난히 통과한 이후 세계 곳곳으로부터 계속 울려대는 ‘새벽 3시’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오바마의 백악관에 지난 18일 다시 비상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도 김정일이었다. 그의 사망을 알리는 급보였다.
김정일의 사망을 ‘게임 체인징 이벤트’로 규정한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실장은 “우리가 알던 북한은 이제 끝났다”라고 단언한다. 그동안 전문가들이 북한 붕괴를 초래할 것으로 가상해온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사안의 비중도 과시용 도발이었던 3년 전과는 다르다. 장막에 가려진 핵보유국 독재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자칫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서는 세계의 안정까지 뒤흔들 수 있는 진짜 위기다. 재선을 앞둔 오바마에게 한층 넘기 힘든 ‘새벽 3시의 비상전화’가 다시 울린 것이다.
첫 2년여 동안 오바마는 북한과의 대화에 임하지 않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정책을 표방해 왔다. 부시의 대북강경책 지양을 천명하며 취임초기 직접 개입하는 적극적 대북정책 의지를 보였던 오바마 행정부는 얼마 안가 소극적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북한의 도발이 잇따른 데다 경제회복이라는 최우선 과제와 이라크 및 아프간 전쟁 등 시급한 사안에 밀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속되는 도발과 계속되는 제재의 악순환 속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던 북미관계는 몇 달 전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조용한 물밑 노력이 전개되어 왔고 그 노력이 이제 막 결실을 보려던 참이었다. 미국과 북한 양국이 24만톤의 식량지원과 우라늄 농축프로그램 가동중단을 맞바꾸기로 했다는 합의사항을 발표하려던 날이 19일이었다.
바로 그날 김일성 사망이라는 메가톤급 변수가 터진 것이다.
모든 것이 전면 중단될 줄 알았는데 이례적으로 식량지원-비핵화 협의가 계속되고 있다. 그것도 북한의 제안으로 실무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포스트 김정일 체제의 북한과 미국의 관계에 첫 청신호가 켜진 셈이다.
이 같은 청신호가 김정일의 장례식이후에도 계속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국은 일단 한반도 평화안정을 최우선으로 다짐하며 북한 주민들에게 위로를 전했고 “북한의 평화롭고 안정적인 전환을 원한다”며 ‘새 리더십’에 대한 어떤 자극도 삼간 채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첩첩산중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20대 후계자 김정은은 어떤 인물인지, 그의 후계체제는 얼마나 뿌리 내렸는지, 그를 둘러싼 집단지원체제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스위스에 유학한 20대 젊은 그의 등장에 새 시대의 희망을 가져도 좋을지, 불안한 입지강화를 위해 무력을 과시하는 무모한 도발을 우려해야 할지, 핵의 통제권은 누구의 손에 있는지…의문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확실한 대답을 알려줄 정확한 정보는 얻을 길이 없다.
중국과의 기싸움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다. 정보의 부재는 영향력의 부재로 이어지니까. 깜깜 소식이었던 미국이나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김정일 사망을 당일에 전달받은 것도 중국이었고 북한 고위층과의 즉석 전화통화가 가능한 나라도 지금은 중국뿐이다. 에너지의 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북한은 중국의 지원이 없다면 “식물국가로 전락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 지는 이미 오래지만 이번 사태는 중국이 북한의 최대 후견국이라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시켜 주었다.북한 주민의 참상을 외면한 채 3대 세습독재를 묵인하는 것이 과연 미국의 떳떳한 정책이 될 수 있느냐는 국내의 비판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오바마보다 터프하다고 과시하고 싶은 미트 롬니의 “독재 정권교체의 기회”라는 주장은 후보의 강경발언으로 접어둔다 해도 “미국이 김씨 왕조 유지에 공모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은 새겨듣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앞날이 전혀 예측불허인 상황 때문일까. 미 정부에 대한 ‘전문가들’의 조언도 “신중하게 지켜보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 가지, 오바마의 우선 어젠다에서 뒤로 밀려있던 북한문제가 주요사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높아졌다. 재선 앞두고 갈 길 바쁜 오바마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할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새벽 3시’는 초선 때와는 달리 대통령 오바마의 성숙해진 역량을 증명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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