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찬열의 최전방지역 도보행진 <8> 화천
화천지역에는 볼거리와 먹거리가 넘친다. 화천에 위치한 자연 체험장으로 인기가 높은 도고미 마을 입구를 알리는 간판.
횡단 여덟째 날이다. 날씨가 흐리다. 이른 아침에 식당을 찾아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붐빈다. 막노동 하는 분들이 많다. 해장술을 한 잔씩 하는 모습도 보인다. 오늘은 오전만 걷고 광주에 내려갈 계획이다. 초파일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열심히 걸어가면 산양이라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분에게 산양 가는 길을 물으니 마침 그쪽으로 가려는 중인데 태워다 주겠다며 트럭을 타란다. 웃으면서 사양했다.
초등학교 앞에 깜찍한 어린 소년의 동상이 서있다. 고추를 잡고 오줌을 누는 모습이다. 귀엽다. 이 앞을 걸어가는 많은 분들이 웃음을 지으며 지나갈 성 싶다. 저런 조각품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적시고 도시의 품격을 높여준다.
오리 농사법 유명한 토고미 마을엔 자연 체험장
지역경제 영향 ‘신병훈련소 면회 부활’ 배너 눈길
화천읍 주민자치위원회에서 ‘벼룩시장’을 개장한다는 배너가 걸려 있다. 이곳도 미국의 거라지 세일처럼 헌 옷가지나 물건을 모아 싼 값에 교환하는 시장이 열리는 모양이다. ‘신병훈련소 면회 부활’ 환영 배너가 펄럭인다. 화천 시장조합에서 내걸었다. 부대의 움직임이 인근 주민들의 생활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제군을 걸어오면서도 군인들의 외출 외박이 금지되면 지역 경제에 만만치 않는 주름이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옷을 꺼내 입었다. 길가 감자 싹이 토실토실 오지게 자라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까치집이 보인다. 까치 녀석은 집에서 비를 맞고 있을까. 아니면 비를 피해 어느 나뭇가지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까.
토고미 마을을 지난다. 오리 모형이 조각되어 있고 ‘녹색체험 관광마을’이라는 표지판이 함께 서있다. 오리 농사법을 실시하고 있는 곳이다. 지나는 농민에게 물어보았더니 오리를 풀어 농사를 짓는 독특한 영농방법이라고 했다. 모를 심은 다음 오리를 풀어 놓으면 논을 휘젓고 다니며 해충과 벌레를 잡아먹는다. 흙탕물을 일으키므로 저절로 논메기가 되고, 오리 똥은 거름이 된단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쌀은 찾는 사람이 많고 값도 녹록치 않다고 했다. 오리와 벼를 함께 기르는 일석이조의 농법이다. 그러나 소규모 농사에나 가능하지 넓은 평야에서는 어려울 성 싶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자동차가 물장을 치면서 지나간다. 비를 피하러 주유소에 들어갔다. 논 물꼬를 둘러보러 나왔다는 분이 먼저 와 있다. 이정태씨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눈다. 57년 닭띠인데 중학을 중퇴하고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중 1때 국민교육헌장을 못 외운다고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그거 못 외운다고 남녀학생이 보는 앞에서 막대기로 머리를 때려? 학교 안 가기로 작심을 했단다. 대화에 거침이 없다. 내가 교사일 때 혹시 그런 상처를 아이들에게 주지나 안 했는지 모르겠다.
열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졸지에 2남1녀 장남으로 가장이 되었다. 스무 살에 결혼을 했다. 일본에 소, 버섯 교육을 받으러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부터 소를 길렀다.
농사를 지어 나락을 그득히 담아 놓고, 산에서 장작을 베어다 쌓아 놓으면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논에 물이 있고, 산에 나무가 있으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다. 동생은 꼭 대학까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제 몫을 다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며 웃는다.
내 평생 일 년에 백석을 수확하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데 지금 삼백 석쯤 하는 농사를 짓고 있으니 목표는 이미 이룬 셈이다. 좀 여유가 있으니 이제 그걸로 주변을 좀 쳐다보며 돕고 살고 싶다고 한다. 사람마다 풀어놓으면 소설책 한 권 분량의 이야기가 나온다. 고비가 많으면 이야기가 풍성해지고, 이야기가 풍성하면 삶도 풍성해진다.
비가 그쳤다. 이정태씨가 자기 집에서 묵고 가라고 제안을 한다. 광주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들러 가겠노라고 했다. 봄 들판에 생기가 가득하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감성테마공원’(이외수)라는 간판이 보였다. 소설가 이외수가 거처하는 곳이다. 여기서 20km 지점이다. 걸어서 다녀오기엔 어림없는 거리다.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경운기를 몰고 간다. 지나가는 트럭이 ‘빠-ㅇ’ 경적을 울린다. 수고하신다고, 응원의 손짓을 하고 지나간다. 군청관광과에 감성마을을 물었더니 이외수 소설가를 만나고 싶으면 이메일을 보내어 시간예약을 해야 한단다.
장작을 처마 밑까지 차곡차곡 쌓아놓은 집이 보인다. 월동준비를 단단히 해 놓았다. 사진 한 장 찍으려는데, 주인이 나와서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장작더미가 좋아 보여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까, 그냥 웃는다. 쌓아놓은 나무 벼늘이 눈에 익은 모습이다. 옆에 세워놓은 리어카까지도 딱 60, 70년대 농촌 모습 그대로다.
어릴 적, 농촌에서는 추수를 끝낸 다음 땔감을 구비해야 했다. 나무를 하느라 험산 깔그막을 오르내렸다. 단풍든 소나무를 갈퀴자루나 작대기로 두들겨 소나무 잎을 털었다. 그런 다음 갈퀴로 긁어모았다. 황토가 보이도록 피가 나게 바닥을 긁었다. 산은 해마다 헐벗어갔다. 도시에서는 연탄이란 게 있었지만 시골에서는 땔감을 장만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난방방법이 달라지면서 사람들이 겨울을 나는 풍경도 달라졌다. 산이 저렇게 푸르게 된 이유도 땔감을 위해 나무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리라. 아직도 농가에서는 나무를 해다 불을 때는 집이 있다고 했다.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골 어른들 중에는 기름보일러를 탐탁찮게 여기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내 몸 하나 움직이면 되는데, 뭣 하러 비싼 돈 주고 기름을 사다 떼느냐”는 얘기다. 이래저래 시골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다 때는 집이 있고, 저렇게 처마 밑까지 빽빽하게 장작을 쌓아놓은 풍경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저런 모습조차 세월이 지나면 추억 속의 그림이 될 것이다.
부부가 고추모종을 옮겨 심고 있다. 가까이 보니 엉덩이에 붙어 있는 이동식 의자가 재미있다. 오순도순 정다워 보이기에 사진을 한 장 찍었더니, "아 사진만 찍으면 뭐혀, 들어와 모종도 해보고 해야제" 하신다. 배낭을 내려놓고 함께 고추모종을 심었다. 몇 년 만에 해보는 일인지 모르겠다. 얘기를 나누어보니 이 마을 이장님이시란다. 화천군 상서면 노동일 이장님이시다.
다시 비가 내린다. 번개가 치고 뇌성이 들린다. 비를 맞고 걸어가면서 생각한다. 죄 지은 사람은 하늘을 두려워할 것이다. 저렇게 하늘이 노하시는 이유가 혹여 나를 벌주시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시인들은 사람의 마음을 잘도 읽는다. 김용택이 쓴 ‘죄’라는 시는 이런 경우에 생겨난 모양이다.
“우르르 쾅쾅 / 천둥 번개 친다 / 알았다 알았어 / 그만두리라 / 내가 내 죄를 알았다”
빗줄기가 굵어져 잠시 길가 상점 처마 밑에 서서 비를 피했다. 상점을 지키던 할머니가 고추를 심어야 한다면서 들에 나갈 채비를 하신다. 비나 좀 그치면 나가시지 그러느냐고 말을 붙이자, 고추는 비를 맞으며 심어야 좋다고 대꾸를 하신다. 비를 맞으며 걸어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골 할머니에게 또 한 수 배운다.
이동식 의자를 허리께 차고, 손으로 끄는 바퀴달린 차에 연장을 넣어 끌고 나가신다.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들에 나가던, 내가 농사짓던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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