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 메디칼센터 병원에 옮겨져, 나를 내려놓은 입원실은 Bascom거리가 내다보이는 널따란 창문이 달린 1층 창가였다. 베스콤 거리를 쌩쌩 달리는 차들의 행렬(行列)! 나도 자주 달렸던 저 거리! 그러나 지금은 풀리지 않은 손의 마비증세로 남의 도움 없이는 음식을 떠먹을 수도 없는 상태인데다, 당분간은 운전대를 잡아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경고성(警告性) 통보는 나를 암담하게 하였다. 한편, 병상침대에 오를 때나 변소 갈 때도, 간병사(남자)나 간호사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처지의 내 눈에 비친 환자 방문객들의 가벼운 발걸음들이 마치 참새걸음 같이 부럽기만 했다.
베리 병원에 도착한 토요일, 주말의 병원 마감시간에 쫓긴 의사들과 병원 직원들의 병실을 분주히 오가는 발걸음들이 요란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밤을 넘긴 일요일 아침의 병원의 정적은 마치 영화 ‘젠.에어’ 에서의 새벽안개에 싸인 산성(山城)별장처럼 고요했다. 이런 정막의 틈새를 타고 내 머리 속에 깔려 드는 상념(想念)은, 만일에 이 애비나 큰놈 세현이 어느 한 쪽이 병실에 누워 있다면, 어느 한 쪽이 그 병실을 찾아가, 쾌유를 비는 위로의 말이라도 할 수 있을텐데 라는 바로 그 생각이었다.
정막의 일요일은 새하얀 7월25일 월요일 아침으로 밝아지고, 그 날 9시부터 시작되는 해병대 훈련 같은, 지옥훈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3시간에 걸친 훈련은 82살 고령인 나에게는 말 그대로 지옥훈련 이었다. 물리치료를 끝내고 병실로 돌아온 내 몸뚱이는 병상에, 무거운 짐짝같이 내동댕이쳐졌다. 극한 표현으로 내 몸은 마치 창호지에 물을 뿌려 놓은듯이 흐느적거린 상태였다. 그 다음날도 그리고 다음날로 이어지는 힘겨운 Therapy(물리치료)에다, 평소에 내 입맛에 맞는 음식만을 고집스레 가려 먹는 나의 식성(食性)에 맞지 않는, 병원 음식을 먹어내지 못함으로 인하여 훈련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몸뚱이는 물이 다 빠져 나간 고목(古木)처럼 까칠해졌고, 끝내는 입술마저 부르터 버렸다.
이렇게 내 앞에 가로 놓인 장벽(障壁) 앞에서, 나에게 던져진 선택(選擇)은 그 장벽을 뚫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하는 둘 중 한가지 선택 밖에 없었다. 만일에 포기의 길을 택한다면 풀리지 않을 손의 마비로 영영 작가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음은 물론, 두 다리의 마비로 침대 신세를 면치 못한다면, 그로 인해 할멈이나 자식들에게 괴로움을 안겨 줄게 불을 보듯이 뻔한 사실 앞에서, 나는 그 장벽을 뚫고 나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 나는 햄릿의 대사, 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 를 외이며, 소태 같이 쓴 눈물을 쏟으며,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며, 지옥훈련의 고지(高地)를 넘고, 또 넘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노력이 테라피 담당직원들의 관심을 끌게 되자, 그들의 호의(好意)적인 반응이 이 늙은 Korean 할아버지에게 쏠리기 시작했고, 끝내는 그들이 나를 PaPa Choo(주 할아버지)란 애칭(愛稱)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다. 게다가 병원식사 아닌, 집에서 가져오는 음식을 먹어도 좋다는 승낙은, 내 훈련의 진도를 호전시키는데 큰 몫을 했을 뿐 아니라, 물기 빠진 고목 같은 내 몸에 새로운 물기로 채워주는 역할까지 해 주었다.
내가 재활치료를 시작한지 15일 만인 8월8일, 내 훈련성과가 급진적으로 좋아져, 곧 졸업(거기서는 퇴원을 졸업으로 표현) 하게 될 것이란 기쁜 소식이 내 귓전에 전해 왔다. 나는 마음 속으로 포기 쪽을 택하지 않고, 그 장벽을 뛰어 넘은 나의 선택이 빛을 보았구나 하는 자부심(自負心)을 가슴으로 느꼈다.
9월11일, 나의 퇴원 여부를 결정하는 Orientation (심의회의)이 병원 회의실에서, 나의 담당의사 둘과 물리치료 담당 수퍼바이저, 나의 음식관리 담당관 등 7명과 나와 딸 민아가 함께 자리한 가운데 열렸다. 이 자리에서의 종합적인 결론이 82살 고령의 나이인 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노력했고, 그래서 회복의 진도가 매우 빨랐다는 의견과 더불어, 물리치료사들과의 우호관계가 매우 좋았었다는 말이 나오자, 딸애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아빠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 잘 버티어 주었구나하는 고마움의 표시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다음 날인 8월12일 오전 10시 나는 작가의 생명과 앞으로는 지난날과 같이 걸을 수 있을 거라는 2중의 희망을 품고 적진(敵陣)에 포위된 위기에서 탈출한 병사 같이, 지난해 드라이브 라이선스 경신에 성공하고 DMV 청사를 나선 그때처럼, 병원에 실려 올 때와는 달리, 딸애가 모는 내 차로 24일 만에 집으로 향해, 베스콤 가도(街道)를 달려가고 있었다 !! (끝)
(아동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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