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일학년 겨울 방학때 나는 첫사랑에 빠졌다. 우리 오빠의 결혼식이 겨울에 있었고, 그 겨울 오빠의 친구였던 그는 눈이 하얗게 온땅을 뒤덮은 그날 내 앞에 나타났다. 과수원이 있던 시골 집 큰 대문을 열자 그가 서 있었다. 거의 한 십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는 내가 국민학교 학생이었을때 우리 집 담장 넘어 뒷집에 살았다. 그후 6.25가 났고 수복 후 이미 불에 타 잿더미만 남은 그 동네에 다시 들어가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그날 진한 북청색 치마에 자줏빛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엄마가 솜씨껏 만들어준 설빔이었다. 그가 나를 보자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 작은 소녀였던 내가 다 큰 처녀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마치 눈부시다는 듯 나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이미 우리들의 사랑은 시작 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길은 숫재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인지도 모르겠읍니다.
온 겨우내 노루랑 토끼랑 꿈을 먹고 자라 나온다는 길
그 길 위에 서면 입 속으로 조그맣게 새겨지는 이름들
홀로라도 좋았읍니다.
봄이 여름이 가을이 가고 흰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이 오면 나는 반드시 돌아올 사람을 위해 그 길 위에 작은 발자욱을 남겨 놓겠읍니다.
그 겨울 그를 만나고 난 후 나는 길이란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다. 그 후 그 겨울 방학은 온통 그를 생각하는 그리움으로 점철 되었다.
그 당시는 전화조차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우리들은 편지로서 서로의 마음을 읽고 확인했다. 가끔 그가 내가 있던 기숙사로 찾아와 Y 대로 올라가는 뒷 숲속 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리가 함께 발견한 밤 하늘에 빛나던 두별, 그 어느날 밤 우리들은 큰 별과 작은별 하나씩을 우리 별로 정했다. 하나는 그의 별, 또 하나 작은 별은 내별, 우리가 교제하던 몇년 동안 서로 만나지 못할때 면 우리들은 밤 하늘에 빛나던 서로의 별을 확인하고 또 그별들이 있는 이상 우리들의 사랑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그리운 옥아!
나는 지금 걸을때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힘겹게 가면서 가끔 얼굴을 들어 밤 하늘을 보며 우리들의 두별을 찾고 있단다. 일선의 겨울은 너무 춥고 고생스럽지만 밤하늘에 빛나는 우리 별들이 있음으로 나는 위로와 힘을 얻고 있어. 옥아! 너무 너무 보고싶다.
이 편지의 구절은 그가 군에 있을때 일선에서 정찰을 하던 중 보낸 것인데 아마 이런식으로 쓰여 있지 않았나 싶다.
사랑은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일수록 더 안타깝고 더 그립게 마련이다. 첫사랑이란 결국 이루어지는 사랑보다 못이루는 사랑으로 끝나기가 십상이다. 우리들의 사랑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 뒤 슬픈 이별과 잠 못 이루던 긴긴 밤이 지나고 우리들의 운명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다시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흐른뒤 나는 가끔 밤하늘을 볼때마다 그 잃어버린 두 별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한국에 가기 위해 새벽녘에 일어나 그라지 문을 열자 거기 그렇게 오래 내가 찾아 헤메던 그 별 둘이 나란히 있었다. 새벽녘이지만 영롱하게 빛나던 두별은 그때 그 별들임에 틀림없었다.
모든 것이 변했고 시간은 너무도 많이 흘러 갔지만 밤하늘에 빛나는 그 별들은 영원히 거기 있었고 아마 지구가 있는한 또 거기 그렇게 영원함으로 빛날 것이다. 사랑할때 우리들은 영원함을 맹세한다. 그러나 인간이 한때 믿었던 영원함은 어디에고 없다. 하루에도 몇번씩 변하는 인간들의 감정을 놓고 영원함을 얘기 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신을 찾고 하나님을 찾아 헤메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삶이 태어날때가 있으면 죽을때가 있고 사랑할때가 있으면 이별의 순간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더 영원 불변함에 목을 매는게 아닐까.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보면 시간은 거기 그대로 있는데 우리들이 그 시간 사이로 그 세월 사이로 덧없이 흘러가며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닐까. 옛날을 생각해보면 좀 가난했어도, 좀 불편 했어도 그때는 낭만이 있고 정이 있고 순수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난했던 연인들은 추운 겨울 밤 하늘의 별을 세며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많이 가졌으나 옛날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인 풍요를 동반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무리 각박하다고 하지만 가끔 우리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볼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옛날의 추억도 돌아다 보고 그런대로 우리들의 삶은 살만하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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