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찬열의 최전방 지역 도보횡단| <2> 강원도 대진항·인제군 황태마을
강원도 최북단에 위치한 대진항에서 이른 아침 어부들이 밤새 잡은 싱싱한 활어들을 내려놓고 있다. / 황태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인제군 용대리가 주산지다. 황태 축제를 알리기 위해 걸어 놓은 황태 모양의 전등들이 이채롭다.
강원도 최북단의 작은 항구 대진항으로 나갔다. 고기를 바닥에 쏟아 놓고 경매를 하고 있다. 어판장이다. 왁자지껄하다. 경매인이 무어라 손가락 암호로 가격을 제시하면 사려는 사람이 소리치며 손을 흔든다. 그러면 거래가 끝난다.
한 쪽에서는 밤새 잡아온 고기를 어부들이 배 밑창 저장고에서 뜰망으로 퍼서 대기하고 있는 작은 트럭에 옮기고 있다. 그물 속에 팔뚝만한 고기들이 퍼덕인다. 작업복을 입은 어부의 구릿빛 얼굴에 건강미가 넘친다.
어부들은 “갈수록 명태 씨 말라…” 걱정
진부령 내려서자 펼쳐진 황태덕장 ‘진풍경’
항구를 한 바퀴 둘러본다. 항구에 매여 있는 배가 많다. 밤새워 작업을 하고 사람과 함께 배도 휴식을 취하는 모양이다. 정박해 있는 배에 ‘민간 자율구조선’이라는 팻말이 선명하다. 유사시 구조활동을 위해 지정된 배다.
연안 유자망(4.57톤), KW 16-960707이라고 고유번호가 붙어 있다. 유자망. 명태잡이 그물로 고기 떼가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띄워 놓았다가 그물코에 걸리는 고기를 잡아 올리는 방식이다. 어부들은 그물을 쳐놓은 다음 하루쯤 있다가 배를 타고 나가 그물을 당겨 올린다.
명태잡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 가운데 “… 손발이 시러워 / 내 못하겠네 / 에야 / 에야 / 청실홍실을 / 목에 걸고 / 소나무 고개를 / 넘어온다”는 대목이 있다. ‘청실홍실을 목에 걸고’라는 구절은 목에 그물이 걸린 채 올라오는 명태를 묘사한 부분이다. 그물 당길 때 도르래 역할을 하는 ‘망께’가 소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나무 고개를 넘어온다’고 표현한다.
바다는 잔잔하다. 지금은 저렇게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파도가 성이 나면 바다는 순간에 악마의 얼굴이 되어 할퀴려 달려든다. 그래서 뱃사람들에게는 ‘판자 한 장 밑이 지옥’이다. 그들은 닻을 올리는 순간부터 지옥 문턱에서 삶을 낚아 올린다. 그것이 삶이다. 그래서 어촌에는 오래 전부터 무속신앙이 뿌리를 내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울긋불긋 지붕 위에 펄럭이는 깃발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사귀환과 풍어를 빈다는데 시비할 명분이란 애당초 없다.
선창을 구경하는데 어떤 분이 다가와 어디 가시냐고 말을 걸어온다. 국토 횡단을 시작한다고 말했더니, 숭어 한 마리 잡수시겠냐고 묻는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숭어 한 마리를 다듬더니 초고추장까지 앞집 식당에서 얻어 일회용 접시에 담아서 가져온다. 갓 잡아온 숭어다.
숭어는 영산강 상류에 자리 잡은 내 고향 영암의 명물이다. 지금은 강을 막아 논으로 변해버렸지만 고기 맛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횡단 첫 날 싱싱한 숭어 한 마리를 먹게 되었다.
명함을 한 장 얻었다. 어판장 경매인 ‘대진수산물 대표 전순관’이라 적혀 있다. 요즈음 명태가 잡히느냐고 물었더니, 온난화로 인해 고기가 북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소련에서 사 온다고 했다. 이북으로부터 어업권을 얻은 중국인들이 촘촘한 그물로 고기를 잡아가기 때문에 씨가 말라가고 있다고 덧붙인다.
며칠이나 걸려야 횡단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무사히 도착할 수나 있을까.
‘1킬로를 줄이면 10킬로 더 간다.’ 전문 산악인이 짐을 꾸릴 때 떠 올리는 말이다. 속옷 한 벌, 비옷, 양말 한 켤레, 비상식량, 비상약품 등, 줄일 만큼 줄인 배낭이라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종일 걷다보면 물병 하나의 무게도 신경이 쓰인다. 짐을 줄이면서도 필요한 건 빠짐없이 들어 있어야 한다. 무겁다는 생각까지도 버리면 발걸음이 더 가벼울 터이다.
‘화랑사단 전적비’가 서 있다. 단기 4292년 11월30일에 세워졌다. 사단장, 중대장, 공병중대장 이름이 적혀 있다. 서기로 몇 년일까 따져보니 1959년이다. 지금부터 52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흔적이 차디찬 한 덩이의 돌로 남아 있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앞쪽에서 나와 비슷한 차림을 한 젊은이가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온다. 국토종단 중이란다. 해남 땅 끝 마을에서 출발하여 고성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라 했다. 희곡을 쓰는 정해성 작가다. 반갑게 얘기를 나누었다. 헤어지고 나서야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했다.
같은 처지의 길동무를 만나면 진정 반갑다. 그래서 한하운도 ‘전라도’라는 시에서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여든 살 정도 보이는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보퉁이를 이고 걸어가시기에 “할머니 어디 가세요” 물었다. “차 타러 정류소까지 걸어가는 중”이라고 대답하신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물었더니, 할머니 왈 “아, 여자에게 나이를 왜 묻는 거야, 그런 건 실례야” 하고 되받으신다. 깜짝 놀랐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얼른 사과를 드렸다.
첩첩산중. 돌고 돌아도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길은 걸은 만큼 줄어드는 모양이다. 마침내 ‘백두대간 진부령’이라는 표지석 앞에 다다랐다.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를 말한다. 한반도의 등뼈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금강산, 그리고 바로 이곳 진부령을 거쳐, 설악산 오대산, 그리고 태백산 죽령 덕유산 등을 빠져나가 지리산까지 이어진다. 종주하는데 며칠이나 걸릴까.
진부령 고개를 내려가는데 황태덕장들이 보인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황태 주산지다. 명태는 갓 잡아 올리면 생태, 얼리면 동태.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하면 황태. 반쯤 말리면 코다리. 완전히 건조시키면 복어. 이 외에도 불리는 이름이 오십 가지가 넘는다. 이 마을에서 황태를 건조해 말린다.
길가 ‘용바위 황태덕장’ 집에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계산대 앞 벽에 시 몇 편이 붙어 있다. 누가 쓴 시냐고 물으니 본인이 썼단다. 당선 소감을 보니 전북 익산군 함열면 성내리 출신이라고 적혀 있다, 친정동네를 꼭 밝히고 싶었던 모양이다.
황태는 해독을 하고 피를 맑게 한다. 황태를 작업은 12월 말 시작하여 이듬해 3월 말이면 끝난다. 이 고장에서 황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50년 정도 되었단다. 아주머니는 35년 전에 황태 일을 시작했다. 익산에서 시집을 왔는데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식량이 없어 약초를 캐다 먹고 살았다. 지금은 부자마을이 되었다고 자랑한다.
식당에서는 황태구이, 해장국, 청국장, 황태찜 등을 판다고 했다. 음식을 만들다 보니 솜씨가 늘어 황태국 잘 끓이는 명인이 되었단다. 전국에 음식 명인이 30명 정도인데 그 중 한 명이란다. 황태국 맛 좀 보시라면서 한 사발 가져온다. 입안에 부드럽게 감겨오는 맛, 그리고 속을 시원하게 하는 맛이 일품이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온다. ‘제13회 용대리 황태축제’라는 애드벌룬이 떠 있다. 황태 모형을 만들어 길을 따라 길게 걸어놓았다. 골짜기가 황태 덕장으로 가득하다.
이곳 용대리에서 미시령과 진부령이 갈라진다. 미시령으로 가면 속초가 나오
고 진부령을 넘으면 간성이다. 옛날에는 속초를 넘어가려면 구불구불 산을 타고 여러 시간을 넘어가야 했는데 요즘은 터널을 뚫어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
이 지방이 황태고장이 된 것은 지리적 요인 때문이다. 원래 설악산 북부 끝자락 협곡이라서 골짜기 바람이 세 농사가 안 되는 곳이었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나물을 뜯거나 약초를 캐어 근근이 살아갔는데,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지역의 특성을 살려 황태 말리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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