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서 지내다 보면 서울에 비해 좋은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우선 공기가 깨끗해서 좋고 또 과일 채소 등 먹을거리가 풍부한데다 가격도 한국에 비해 저렴해서 좋다. 이 외에도 축구 야구 농구 테니스 아이스하키 등 사회체육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도 한국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는 주말은 물론 평일 저녁에도 많은 사람들이 야외에서 운동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테니스의 경우에는 지역마다 시설이 잘 되어있어 코트가 부족해 운동을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필자는 주로 잠실5단지 내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 운동을 한다. 잠실4거리에 위치한 5단지에는 클레이코트가 6면 있는데 회원 수는 약 150명에 이른다. 회원 구성은 은퇴를 한 어르신들부터 국가공무원, 대기업임원출신, 은행원 및 은행지점장, 사업하시는 분, 중·고교 선생님 그리고 대학교수 등 직업별로 다양하다.
회원들은 대개 아침 6시부터 운동을 하고 난 후 출근하는 아침 반과 퇴근 후 저녁 9시까지 운동하는 저녁 반으로 나눠진다. 저녁 반의 경우에는 운동이 끝나면 가끔 맥주나 막걸리를 가볍게 한잔 하고 헤어지는데 이 시간이 되면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다.
한국에는 ‘밥테회’라는 말이 있다. ‘밥 먹고 테니스만 치는 여성회원들’을 일컫는 말이다. 얼핏 들어보면 집안일은 뒷전으로 하고 테니스만 치는 여성들로 오해하기 쉬운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여성회원들은 열심히 운동하는 만큼 집안일과 자녀교육에도 최선을 다한다. 실제로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부터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테니스를 그만 두고 대학진학 이후 다시 테니스장으로 나오는 여성회원도 있다.
열정이 대단한 만큼 5단지 여성회원들의 테니스 실력도 수준급인데 여성회원 절반 이상이 국화부에 속해 있다. 보통 우리나라 아마추어 테니스는 남자와 여자의 경우 각각 금배부, 은배부 그리고 국화부, 개나리부로 구분하는데, 테니스 시작한지 13년만인 50대 후반에 처음으로 개나리부에서 우승하여 국화부에 들어간 회원도 있고 우리나라 전체 아마추어 랭킹 10위권 내에 속해있는 여성회원도 있다.
대부분의 여성회원들은 한 달에 1번 정도 테니스장 내에 있는 건물 2층에서,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와 나눠 먹는 파틀럭(potluck) 파티를 연다. 맛있게 식사하며 서로가 일상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주고받는다.
매달 첫째 주 일요일에는 월례대회가 개최된다. 어떤 회원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십분 발휘하기위해 며칠 전부터 금주하며 컨디션을 조절하기도 한다. 매달 개최되다보니 게임을 대충 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제로 대회우승을 위한 회원들의 의지는 아주 강하다. 그래서 가끔은 경기 도중 회원들 간에 ‘인-아웃(in-out)’ 시비로 인해 목소리가 높아지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일정이 끝나면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며 화기애애한 뒤풀이가 이어진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말처럼 5단지에는 마음이 넉넉한 분이 많다. 필자를 고향후배라고 테니스장에 나갈 때마다 저녁을 함께 하자며 매번 챙기는 분도 있고 또 필자가 기러기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는 과일을 박스채로 사서 먹으라고 직접 테니스장으로 가져오는 분도 있다. 이 외에도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며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분, 잠자리가 일정치 않은 필자에게 빈방이 있으니 자기 집에 가서 자자고 하는 분, 그리고 어떤 한 회원은 아예 자기 집 저녁식사 시간대를 알려주면서 매일 같이 식사하자고 한다. 모두들 고마운 분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잠실5단지도 아파트가 노후화되어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전체 주민 수에 비해 테니스 회원 수가 소수이다 보니 단지 내에서의 입지는 약한 편이다. 그래서 매달 열리는 동대표 회의에서는 아예 테니스장을 없애고 주차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100세대도 되지 않는 조그만 단지 내에 야외 수영장시설까지 갖추어져 있는 미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아쉬움이 많다. 물론 국토가 넓은 나라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미국의 사회체육시설을 생각하면 부러울 따름이다.
5단지 옆에는 1,2,3,4단지가 있다. 이들 단지는 이미 3-4년 전에 재건축을 마쳤는데, 아쉽게도 기존에 있었던 테니스 코트는 모두 사라졌다. 참여정부 이후 지속된 각종 부동산 규제 정책과 개발논리 때문이다.
5단지도 같은 길을 걷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국외대 교수/ UC버클리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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