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의 요지부동 세금인상 반대로 워싱턴의 부채상한 협상이 번번이 결렬되자 최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개탄했다 : “국가위해 일하는데 어느 한사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니, 도대체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가?”
그 ‘한사람’ 그로버 노퀴스트는 아마 대부분 한인들에겐 낯선 이름일 것이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극우보수진영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그는 특히 세금반대 운동의 기수다. 25년전 레이건의 부탁으로 ‘조세개혁 위한 미국인들(Americans for Tax Reform)’이라는 세금반대 단체를 설립해 지금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조세개혁보다는 무조건 세금을 줄여 ‘작은 정부’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난 정부의 크기를 욕조에 처넣어 익사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축소시키고 싶다…소득세, 상속세, 정부 규제가 없는 시대로 미국을 되돌리고 싶다”고 공공연히 선언하는 노퀴스트는 보통사람의 시각으로는 공감하기 힘든, 그래서 외면하면 그만인 과격한 극우파다. 그러나 공화당 정치가들에게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에겐 강력한 무기가 있다. 유명한 ‘납세자 보호서약(Taxpayer Protection Pledge)’이다. 선출직에 출마하는 공화당 후보들에게 지원을 대가로 그가 받아낸 일종의 충성 맹세다. 어떤 종류의 세금인상도 반대하겠다는 이 서약서에 대부분 공화당 정치가들이 서명했다. 현직 연방 상원의원 41명, 하원의원 236명에 더해 전국 각 주의원 1,200여명까지.
당선 후 마음 변하기 쉬운 후보들의 공약을 문서화시킨 것이지만 물론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정치가의 자필 서명이 들었으니 그 효력은 무섭다. 어길 경우, 다음 선거에서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뉴스위크는 세금서약이 “미국의 정치를 변형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도 현재 연방정부가 디폴트 위기에 처하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바로 ‘노 택스’ 서약을 꼽고 있다. 이 서약에 서명한 수 백 명 의원들이 부채상한 증액협상에서 세수인상을 적극 반대하며 타협을 원천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잘되면 아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노퀴스트의 ‘성업’에 자극을 받았는지 다른 이익단체들도 정치가들에게 온갖 서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후보들이 난무하는 2012년 대선 공화당 지명전에서 특히 심하다. 세금반대 서약은 물론, 동성결혼을 반대할 뿐 아니라 자신의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다는 정절약속까지 포함한 14개항 ‘결혼 서약’이 있나하면 반낙태주의자를 보건부와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겠다는 ‘프로라이프 서약’도 있다.
한 표가 아쉽고, 한 단체의 반대라도 두려운 고만고만한 역량의 공화대선 후보들은 대부분 한 두 가지 서약에 이미 서명을 한 상태다. 가끔 용기를 보여주는 정치인도 있다. 2008년 대선 땐 존 매케인이 “어떤 대통령도 그런 틀 안에 자신을 가두어선 안 된다”며 세금서약에 서명을 거부했고 금년엔 합리적 중도파로 알려진 존 헌츠먼이 “난 국가와 내 아내에게만 충성을 서약한다”며 거부한 것으로 알려진다.
요즘 미디어엔 ‘미친 공화당(crazy GOP)’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지난 주 오바마와 존 베이너 연방하원의장 간의 적자감축 협상이 결렬된 후 부터다. 4조달러 규모의 ‘빅딜 패키지’가 당내 보수파들의 “증세 결사반대”로 무산되어 버린 것이다. 오바마가 민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메디케어 수혜연령 인상까지 제안하는 등 전례없는 양보를 보였지만 ‘노 택스’ 교리에 묶인 공화당은 이를 거부, 판을 깨버리고 말았다. 성사되었더라면 공화당의 ‘역사적 승리’로 기록되었을 텐데 망쳐버렸으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냐는 것이다.
이처럼 의기양양, 협상의 중심에서 우세를 과시하던 공화당의 강경입장이 요 며칠 사이드라인으로 밀리고 있다. 디폴트 위기를 피해갈 새 희망이 생기면서다. 19일 상원의 양당의원 6명이 모인 ‘갱 오브 식스(6인방)’가 제시한 적자감축방안에 상원 과반수가 지지를 표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즉각 수용의사를 밝혔을 뿐 아니라 다음날 초당적 감축안이 합의된다면 그동안 반대해왔던 단기적 부채상한 증액도 받아들일 것을 시사했다.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위기해결은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다.
하원의 입장은 다소 난감해졌다. 19일 균형예산을 명시한 헌법 개정을 포함한 극단적 적자감축안을 통과시켰지만 보수진영을 향한 정치적 제스처일 뿐 입법화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제는 앞으로다 : 상원을 통과할 6인방 감축안도 계속 세금인상 반대를 내세워 거부할 것인가. 단기적 부채상한 증액안도 부결시켜 디폴트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것인가.
계속 ‘노 택스’만을 고집하다간 자칫 정치적으로 고립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여론도 등을 돌리는 중이다. 부채상한 증액 반대가 높던 여론이 지지 쪽으로 선회했고, 지출삭감과 세금인상을 병행하는 오바마의 적자감축안에 대한 지지가 58%로 삭감만을 고수하는 공화당 안에 대한 36% 지지보다 훨씬 높다. 보수신문 월스트릿 저널의 조사 결과다.
부채상한 증액 시한까지는 이제 11일밖에 남지 않았다. 공화당 의원들의 선택도 급해졌다. 재선 때의 보복을 겁내며 노퀴스트에게 충성을 계속할 것인지, 미국의 디폴트를 막는 용기를 발휘하며 마음속으로 새로운 서약을 할 것인지…대부분 의원들이 국가를 위해 새로운 ‘서약’에 서명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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