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은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막강한 권한을 가진 법원이다. 죽거나 스스로 은퇴하지 않으면 평생 계속할 수 있는 종신제인 9명 대법관들에겐 보스가 없다. 이들에 대한 행정부의 권한은 지명과 함께 끝나고 입법부의 권한 역시 인준과 함께 끝난다. 인사권이 없으니 대법원장도 대법관들의 보스는 아니다.
국민의 투표로 얻은 것도 아닌 이 무소불위 권한에 대한 도전은 미 역사에서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연방대법원과 갈등이 심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법관 정년제 도입안 등 대법원의 입지는 개혁추진을 통해 수차례 위협을 당해왔다. 그러나 도전은 번번이 좌절당했고 대법원은 권한을 손상당하지 않은 채 지금도 건재하다. ‘불편부당한 판결’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국민의 지지 덕분일 것이다.
연방대법원에 대한 미 국민의 절대적 신뢰가 굳어진 것은 1950~60년대 얼 워런 대법원장 시대를 지나면서였다. 그 시절 인종통합교육과 피의자 인권보호를 비롯한 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수많은 판결을 통해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연방대법원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데 지난 몇 년, 힘없는 보통사람들에게서 대법원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2주전 끝난 2010~2011년 회기의 판결들이 이 같은 대법원의 ‘변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견상으로의 현 대법원은 드라마틱하게 ‘발전’했다. 여성 대법관이 3명으로 늘었고 연령도 젊어져 50대가 3명이나 되니 훨씬 에너제틱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5명 보수파가 다수로 연대한 금년도 대법 판결들은 극우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 금년 케이스들은 그다지 핫이슈는 아니었다. 케이스 자체보다 일련의 판결에서 나타난 대법원의 친기업 성향이 더 눈길을 끈다. 소비자나 종업원보다는 대기업의 손을 들어주었고 돈 선거를 제한하려는 선거자금법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며 보수 파워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기업관련 판결을 통해 대법원이 무엇보다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집단소송 고삐잡기인 듯싶다.
미 사회에서의 집단소송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지난 40년 가까이 미국의 직장에서 성별 및 인종차별을 뿌리 뽑는데 강력한 힘이 되어준 것이 집단소송이었다. 대학의 여성교수로부터 식품회사 여성 종업원, 석유회사 흑인 종업원들이 제각기 대학과 회사를 상대로 한 차별 집단소송을 통해 평등대우에 한 걸음씩 다가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년 대법원은 월마트 종업원들의 여성차별 케이스와 AT&T 소비자들의 사기분쟁 케이스에 대한 판결을 통해 집단소송 제기 자체의 문턱을 높여놓았다. 10년에 걸친 월마트의 종업원 성차별 여부도, 셀폰회사가 계약 체결시 소비자를 속였는지 여부도 법정에서 가려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고용주나 기업에 대한 비슷한 소송도 제기하기가 힘들어졌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보수화체제가 이처럼 해마다 강화되면서 진보진영의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민주당의 패트릭 레히 연방상원 법사위원장은 “개인을 희생시켜 기업을 도운 판결”이라고 대법원을 향한 거센 비판을 쏟아냈고 리버럴 칼럼니스트 E.J. 디온은 워싱턴포스트에서 “가장 힘 있는 자를 옹호하는 연방대법원”이라고 꼬집었다.
78세 최고령으로 암수술을 받은 루스 긴스버그 대법관에 대한 진보파들의 사임압력 루머까지 돌고 있다. 물론 긴스버그는 일축했지만 “만약 오바마가 재선에 실패한 후 긴스버그가 은퇴한다면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의 입성으로 연방대법원은 절대보수화가 될텐데…” 일각의 상상에서 리버럴 진영의 패닉상태가 읽혀진다.
그래도 금년회기는 조용한 편이었다. 다음 회기는 예상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법조계도, 정치계도 2011~2012년 회기는 수십년만에 가장 격렬할 ‘세기의 회기’가 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상당수 뉴딜법안이 연방대법에서 위헌판결을 받은 후 루즈벨트 대통령과 연방대법원 사이의 ‘대충돌’이 야기되었던 1930년대 이후 가장 뜨거운 논쟁이 재연될 것이다.
정계뿐 아니라 보통 미국인에게도 상당히 감정적인 논란 이슈들이 연방대법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헬스케어 개혁법, 동성애자 결혼권 보호, 그리고 애리조나를 비롯한 각 주의 반이민 단속법안들에 대한 합헌성 심사다. 만약 이 3가지 판결들이 내년 회기가 끝날 무렵 줄줄이 나온다면? 그때가 6월말, 대선캠페인이 본격적으로 뜨거워 질 시기에 던져질 핫이슈 판결들은 글자그대로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현재 대법원의 보수성향을 감안하면 반이민 악법들이 합헌으로 선언되는 ‘공포의 호러 스토리’가 현실화될 지도 모른다. 무보험자보다는 보험회사 편에 서고, 이 사회의 소수자인 동성애자의 기본권을 외면하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판결이 계속된다면 연방대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존중이 지금까지처럼 계속 되기는 힘들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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