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이던가. 한국에서 떠나기 몇달 전 나는 소설가 C 씨의 부음을 들었다. J 신문에서 그의 사망을 몇줄의 글로 짧막하게 다뤘다. 그래도 한때는 잘나가던 유명한 작가였는데 이렇듯 몇줄의 글로 이승과 이별한 그가 안타깝게 느껴졌으며 새삼 허망함이 가슴을 쳤다.
내가 대학 삼학년이던 무렵, 국문과 친구들 몇명과 문학을 사랑하는 Y 대생 몇명과 이미 사회생활을 하던 남자들 몇명이 어우러져 만든 문학 동인회 이름이 새얼회였다. C씨와 Y 씨는 어느 신문사의 기자였다. 사실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는 우리들이 만든 동인회의 이름이 새얼회란 것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우연히 읽게 된 수필 공원이란 잡지에 Y 씨가 쓴 수필을 보고야 새얼회란 이름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고 그 글의 내용은 나를 깜짝 놀라게 아니 감동의 전율까지 몰고온 게 사실이다.
새얼회는 우리들의 시와 수필 등 꽁트 같은 글을 담은 최초의 동인지였다. Y씨가 편집과 출판을 맡았다. Y 씨는 그동안 그 동인지를 무슨 보물단지처럼 끼고 살았는데 한참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하숙비를 못내고 쫓겨 다니면서 결국은 그 동인지를 잃어 버리게 되었고 몇년간 그가 애타게 청계천의 고물상까지 뒤져가면서 그것을 찾아 헤메는 이야기가 소상하게 그려 있었다. 결국 그는 어떤 사람의 이민 가는 이민 보따리 속에서 그것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것을 다시 찾은 기쁨과 동인지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가 열여덟살때 쓴 시가 그의 글 속에 있었다. /물결이 쓸어간 강변에 활활 노을이 탄다.물새도 없다. 이제사 눈물처럼 온몸에 노을빛, 노을빛 강물이 흐른다./ 강물이란 시는 아마 이렇게 끝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그때 감동 시켰던 이유는 내 시가 아니라 그가 그 시절 내 시를 너무 좋아해서 마치 김소월의 시 처럼 매일처럼 읊고 다녔다는 그 대목에서였다. 대학 삼학년의 풋내기 시인의 시를 김소월의 시처럼 사랑했다는 그 대목에선 감격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는 시 뿐만이 아니라 나를 몰래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도 고백했다.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그것도 외국에서 내 시를 사랑하고 나를 좋아했던 사람의 글을 읽는 기분을 무어라고 포현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Y씨의 얼굴과 그 모습을 상기해 보았다.
몇 년후 내가 책을 출판하기 위해 귀국했을때, 나는 C 씨와 Y 씨를 함께 만날수 있었다. 시청 앞 어떤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함께 식사를 했다. 내가 Y 씨에게 물었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고, 나를 좋아한다고.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 시절 C 씨가 대놓고 나를 좋아한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자기는 도저히 수줍어서 말할 수가 없었노라고.
이미 우리들은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수 있을 만큼 적당히 나이도 먹고 뻔뻔해지고 서로가 편해진 것이다. C씨는 소설가로, Y 씨는 출판인으로 모두 다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Y 씨는 스테이크를 우리에게 사주면서 자신은 이제 준 재벌이라고 자랑 비슷하게 말했다.
이제 그들은 옛날처럼 가난하지 않았다. 아니 모두 부자가 되어 있었다. 커피 한잔 값이 없어서 슬펐던 그 시절, 우리들은 너나 없이 가난하던 문학을 사랑하던 문학도들이었다.
옛날 무교동과 명동의 갈채 다방과 돌체라는 음악실을 휩쓸고 다닐때 C 씨의 무작정한 구애에 나는 오히려 질려 있었다. 어느 늦가을 날 그는 병을 얻어 다 죽게 되었다고 동인회의 일원이던 한 친구가 귀뜸해 주어서 우리는 그가 묵고 있었던 어느 시골집으로 병문안을 갔던 기억이 있다. 그의 핼쑥한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고 한편 짜증나기도 했는데 돌아오는 길은 지천으로 핀 코스모스가 슬프게 보였다. 가난했으나 우리들은 문학이 있고 시가 있고 젊음이 있어서 행복했던 시절이다.
그후 Y 씨의 배려로 그의 출판사에서 내 책이 두권 나올수 있었다. Y 씨는 이제 영국풍의 중후한 신사로 변해 있었다. 그에 비해 C 씨는 여전히 독설가며 깐깐하고 깡마르고 예리하게 빛나는 그의 두 눈빛만 변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불우한 노년을 그의 변호를 맡았던 어느 변호사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의 변호사는 결국 그의 결백을 증명했지만 그가 감옥에 가 있던 동안에 부인과 아들이 죽었고 결국은 그도 병을 얻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의 초라하던 영결식장엔 꽃도 없었다고 그의 변호사는 담담히 적고 있었다.
인생무상!/우리들은 기약 없이 또 다시 헤어졌다 옛날 추억의 거리 무교동에서,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손을 흔들고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헤어졌다. 이제 우리 앞에는 산이 가로 막혀 있고 태평양이 놓여 있지만 육신적인 거리보다 더 멀고 먼 살아온 거리가 있다./ 나는 어느날 쓴 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이제 새얼회가 갔듯이,C씨가 갔듯이 새얼회의 멤버들도 어느날 하나 둘 이 세상을 떠나 갈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가슴 속을 헤치고 지나간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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