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말에 열흘간 프랑스 여행을 다녀왔다. ‘수도원과 건축 기행’이라는 조금은 특별한 목적을 갖고 친구들과 오랫동안 준비한 여행이었다. 파리에서 출발해 바르비종과 오툉, 클뤼니를 지나고 액상 프로방스와 생폴 드방스, 아비뇽, 보르도를 거쳐 파리로 돌아온, 총 거리가 2,400km가 넘는 꽤나 먼 여정이었다.
퐁트네 수도원, 마들렌 성당, 생 라자르 대성당, 클뤼니 수도원, 라 뚜레뜨 수도원, 르 또로네 수도원, 세낭크 수도원, 아비뇽 교황청, 생트 푸아 성당… 우리가 방문한 10여개의 수도원과 성당들 외에도 로마시대 유적이 남아있는 오래된 성과 마을을 찾아다니며 천년이 넘는 역사와 종교, 건축과 예술을 종합적으로 경험했다.
하룻밤은 수도원에서 숙박하는 특별한 체험도 했고, 한 세기전 많은 예술가들이 살며 작업했던 바르비종과 생폴 드방스에도 들러 골목골목 예쁜 집들과 샵들로 이루어진 로망의 도시에서 한숨을 쉬기도 했으며,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남프랑스와 알프스 산자락의 아름다운 경치를 물리도록 구경했다.
수도원은 4-5세기에 처음 생겨난 것으로 전해진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가 권력화하고 세속화되자, 예수의 삶을 따르기 위해 세상과 단절한 채 광야로 나가 수행 또는 고행하는 사도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4세기초 이집트에서 고립된 금욕생활을 했던 성 안토니오가 ‘모든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초의 수도사로 기록돼있다.
이후 집단이 형성되고 공동체생활을 하게 되면서 수도자들이 하나하나 돌을 쌓아 손으로 지은 건물들이 수도원이 되었고, 529년 베네딕트(분도) 수도회를 창건한 베네딕토가 수도원 생활의 규범으로 세운 규율이 중세 모든 수도원의 질서와 규칙이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원은 왕권과 결합, 부패하고 사치해졌으며 한때 그 숫자가 수천개에 이를 정도로 비대해지자 수도원 정화운동이 일어난다. 10세기초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12세기초 시토수도회의 개혁운동 등 중세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수도원들은 주기적으로 부패하고 자정하기를 계속했으나, 왕정이나 영주들과 결탁해 민중의 고통을 외면했던 죄로 프랑스 대혁명 당시 폭도들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유서 깊은 수도원들은 20세기 들어 원형대로 복원됐지만 수도원의 기능보다는 건축물의 복원에 지나지 않아 기념관 혹은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을 받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청빈을 원칙으로 가장 엄격하고 검소하며 절제된 단순함으로 지어진 시토수도회의 수도원들을 많이 보았는데, 여기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돌이었다.
중세 수도원들은 전체가 돌로 지어진, 벽이 두껍고 창이 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기 때문에 어딜 가나 돌을 만났다. 바닥도, 벽도, 기둥도, 천정도 돌인 수도원에 들어서면 돌이 주는 서늘한 기운과 냄새, 돌의 숨결이 훅 다가왔다.
회랑의 돌 아치들 사이로 비스듬히 선을 그으며 새어든 정결한 햇살무늬의 배열은 그 자체로 예배요 수도였다. 말할 수 없는 돌의 신비, 움직임 없이 그 자리를 천년이나 지켰을 돌의 고요와 침묵이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돌들이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인간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고. 고대의 바벨탑으로부터 중세의 수많은 로마네스크 수도원과 화려한 고딕 성당들, 당시에는 최첨단기법으로 엄청난 재물과 수십년의 시간을 들여 가장 높고,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었던 건축물들이 불과 500년만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분명히 목격하면서도 교회들은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고. 수도원 터에는 돌이라도 남아있지, 500년이 아니라 50년 앞도 알 수 없는 요즘 시대에 콘크리트와 철골로 쌓아올리는 현대판 바벨탑들은 과연 훗날 무엇이 되어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돌들의 소리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나는 또한 그동안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며 살았는지를 돌아보았다. 지난 수십년 내뱉은 수억 마디의 말들은 어느 허공을 떠돌며 얼마나 많은 냄새와 흔적과 상처를 만들어 냈을까. 적어도 수도원에 들어섰을 때만은 우리는 돌과 함께 침묵하며 돌의 숨결에 잦아들었다.
정숙희 특집 1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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