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잎에 담긴 가을을 책 속에 잠시 숨겨 두었다가, 가끔씩 꺼내어 가을을 느낍니다.”로 시작하는 어느 날의 일기. 이제 막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그 해의 일기장을 가끔 들추어본다. 그럴 때면, 그 시절의 순수함에 지금의 모습이 정화가 되기도하고, 처음 세웠던 초발심 서원에 새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나뭇잎 하나가, 이렇게 가을의 정취를 오래도록 느낄 수 있도록하는 것처럼, 초발심의 순수한 공부심으로 가득했던 시절의 기록들은 나를 새롭게 깨어나게 한다.
#1. “모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부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만납니다. 그러면, 오늘 어떤 분을 만났어도그 분들의 모습이 다 받아들여집니다. ‘아, 부처님께서 지금은 마음이 안 좋으신가. 얼굴에 상심이 있으시네. 부처님께서 무슨일이 있으신가 보다.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 보다. 부처님께서 마음에 좋은 일이 있으시네….등등.’ 이렇게 생각하게 되지요.이것이 바로 매 순간 부처님을 모시는 마음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친구가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을 볼 때, 나에게 무슨 잘못이있어서 그런가. 왜, 나에게 얼굴을 찌푸리지...라고 생각하려던 순간에. ‘부처님이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다’ 라는 마음이되니까. 저절로 그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참 신기하네요. 비 오는 오늘 참 좋습니다. 많은 부처님이 저에게 인사하러오셨는데, 오늘은 제가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보내고 만 부처님도 많았네요. 내일부터는 놓치지 말고 잘 해야겠어요.”
#2. “아! 달님을 보면서 우선 내게 소원을 빌어달라고 했던 사람들 이름을 떠올리면서 그 분들의 소원과 서원이 이루어지길간절히 염원하고. 그리고 스승님과 가족과 이웃과 상하좌우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진정으로스스로가 마음과 의식을 우주로 열고, 역사와 사회와 세계와 호흡하면서 이 사회에 이익이 되는 사람이 되어지이다. 뜻은 소태산대종사님과 통하고, 마음은 법신불과 통하여지이이다.”
#3. “아직 눈 앞의 산이 너무도 크게만 느껴진다. 아직 아는 것도 부족하고 뭔가 환하게 보이기 보다 막막할 때가 많다.하면 된다는 이치와, 정성이 실력이다라는 법문으로 오늘도 나의 부족함을 자각하면서 공부하고 정진한다.”
#4. “오늘은 "파란눈의 성자들"이란 책을 읽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잠깐 읽기 시작한 것이 수업 중간 중간 손을 놓을 수없더니 결국은 한참을 그렇게 눈물을 흘리다가 지금은 조금 어지럽다. 성직자의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를 놓고서 온전하게 다른사람들을 위해서 (아니 사실 그 파란눈의 성자들은 이러한 삶은 곧 내 기쁨이기 때문에 이렇게 평생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하지만) 그렇게 일하고 함께 생활할 수 있을까. 내 안의 욕심들이 그 분들의 아름다운 뜻과 만날 때마다 내 욕심들은 눈물이되어서 계속 주르르 볼을 타고 내려왔다. 나라는 상 안에 갇혀서 온전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참회의 눈물.
“박호 신부님, 정일우 신부님, 에블린 수녀님, 노인조 수사, 오딜 수녀님, 원법우 교무님” 이렇게 여섯 분의 파란 눈의성자들의 삶은 그대로 나에게 무엇인가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이 분들의 사랑의 실천은 하루, 일 년, 십 년에 걸친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에게 다가오는 이 분들의 삶은 특별했다.
과연 세상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나온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글자가 아닌 오딜 수녀님의 70년 세월이 만들어낸그 분의 환한 웃음 앞에서 또다시 나는 끊임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 사진이 담고 있는 것은 이 책이 말하는 그 전부와도같았다. 그 평온한 주름들에서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지만, 그렇게 맑고 또 맑을 수 없는 그 분의 얼굴에서 나는 미래의 나의모습을 그려보았다. 나의 미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다시 주저리 늘어놓던 내 마음들을 좀더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이 책에서 만난 여섯 분의 파란 눈의 성자들을 통해서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삶, 나를 드러내지 않는 삶, 절대자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삶, 진리를 내 삶에서실천하는 삶, 저에게 가난을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삶, 세상 모두를 내 가족으로 여기며 사는 삶, 함께 사람들과 아픔과 고통과기쁨을 함께 하면서 그 들에서 하나님을 부처님을 발견하는 삶, 다른 사람의 행복을 통해서 나의 행복을 찾는 삶, 작은 것에서진정한 감사를 느끼는 삶, 농부의 땀을 기억하는 식사, 검소하고 담박한 삶, 무소유의 부유함을 아는 삶, 함께 사는사람들에게서 교훈을 얻는 삶, 단순한 삶, 인연을 소중히 하는 삶.”
우선 이 분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것들을 나열해보고, 내일 다시 정리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이렇게내 안의 모든 탐진치를 참회하는 기도로 마무리를 하고 말이다.”
이렇게 아련한 기억을 가끔 되살릴 수 있도록 오늘의 내 마음을 기록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연일기장에서 새 마음을 열고 하루를 시작한다.
(원불교 샌프란시스코 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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