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뷰 / ‘알레그로, 펜세로소, 모데라토’ 출연 소프라노 홍혜경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주역 소프라노로 27년째 노래하고 있는 소프라노 홍혜경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세 아이가 있는 가정을 완벽하게 지켜온 스타 성악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상심에 빠져 3년간 오페라 무대에 서지 않았던 그녀는 지난 3월 메트에서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으로 새삼 스타덤에 올랐다. 51세의 그녀가 틴에이저 줄리엣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것이 얼마나 센세이셔널 했던지 공연 평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릿 저널이 대서특필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더구나 그 공연은 원래 줄리엣 역의 소프라노 앤젤라 게오르규가 개막 하루 전 신병으로 출연을 취소하면서 갑자기 홍혜경에게 떨어진 것인데, 이를 완벽하게 노래하고 연기해 청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오는 7월17일 할리웃보울에서 두다멜 지휘의 콘서트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리우 역을 맡아 또다시 LA를 방문하게 되는 홍혜경을 ‘알레그로, 펜세로소, 모데라토’ 공연 오프닝 이틀 전인 3일 인터뷰했다.
너무 잦은 공연·녹음 등 유혹에 넘어가면 도태
‘투란도트’ 리우역 맡아 7월 할리웃 보울서 공연
-무용공연에서 연주한 적이 있나요.
▲처음이지만 마크 모리스 댄스그룹이 워낙 유명하고 무용과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라이브로 엮어나가며 공연하는 그룹이라 출연하기로 했죠. 또 헨델의 오페라를 무척 좋아하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메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큰 화제였지요.
▲너무 재미있었던 공연이었어요. 첫 리허설 때 줄리엣 역의 앤젤라 게오르규가 나오긴 했는데 연습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이었어요. 어쩌면 커버인 내가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정말 공연 전날 게오르규가 출연을 취소하는 바람에 메트의 콜을 받았죠. 나는 준비가 돼있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곳 세리토스에서의 리사이틀이 취소돼 한인 팬들의 실망이 컸는데요.
▲아, 맞아요. 죄송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공연과 날짜가 겹쳤지요. 메트에서 리사이틀을 연기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더군요. 다행히 세리토스 퍼포밍 아츠센터에서 양해해 줘서 다음 기회로 미뤘답니다. 내년은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2013년에 올 수 있을 거예요. 한국 분들이 많이 오실 줄 알고 가곡도 많이 준비하고, 피아니스트(블라드 이프틴카)와 LA 한국음식 많이 먹자고 좋아했었는데, 한인 팬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메트에서만 27년 노래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현재 메트에 있는 여자 가수 중에서 내가 가장 수명이 긴 데뷰턴트(oldest and longest debutant)예요. 그렇게 살아남으려면 세 가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훌륭한 테크닉을 유지해야 하고, 둘째 자기 목소리에 맞는 레퍼터리를 고를 줄 알아야 하며, 셋째 스케줄 관리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20대에 데뷔할 때부터 알았다는 건가요?
▲그럼요. 대학 다닐 때 메트 오페라와 시티 오페라 공연을 많이 들었는데 거기서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했던 가수가 불과 몇 년 뒤 목소리가 가서 더 이상 노래하지 못하게 된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아름답던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니, 너무나 놀라고 쇼킹해서 내게 깊은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왜 목소리가 나빠졌지요?
▲노래를 잘하면 유혹이 너무나 많아요. 여기저기서 부르고, 유명한 지휘자가 협연하자고 하고, 좋은 오페라단이 초청하고. 음반사들은 녹음하자고 하고, 매니저들은 많이 공연을 보내려고 애쓰지요. 아직 어리고 경험과 자제력이 부족한 젊은 가수들은 거기에 쉽게 도취되고, 오라는 데마다 다 가서 하다 보면 소리를 버리게 되는 겁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죠. 그런 가수들을 너무 많이 지켜본 저는 절대 목소리에 부담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레퍼터리 선정은 왜 중요한가요?
▲사람은 모두 타고 나는 목소리가 있어요. 칼라스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있고, 홍혜경은 홍혜경의 목소리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 소리에 맞는 역을 찾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처음 데뷔했을 때 ‘나비부인’을 하자는 제의가 너무나 많았지만 모두 다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목소리는 나비부인이 아니기 때문이죠. 절보고 왜 모차르트만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목소리는 모차르트와 헨델에 훨씬 잘 어울리거든요. 그런데 여가수들은 나이가 들고 애도 낳으면서 소리가 좀 커지고 따스해지고 성숙해지기 때문에 레퍼터리를 조금씩 넓힐 수 있어요. 저도 라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를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내 목소리에 맞을 때까지 15년이나 기다려서 7년 전에 겨우 시작했답니다. 그렇지만 라보엠의 미미와 투란도트의 리우 역은 아주 잘 맞아서 100번도 넘게 한 것 같네요.
-LA 오페라와는 2002년 ‘투란도트’의 리우 역을 했는데 또 다른 계획은 없나요?
▲LA 오페라와 얘기 중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오페라한 지가 얼마 안 되고, 11학년인 아들이 있어서 뉴욕을 떠나 다른 데 간다는 것이 아직은 힘들어요.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면 그땐 하고 싶은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 전에는 멀리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번 마크 모리스 공연은 오페라처럼 한 달 이상 시간을 내야 하는 프로덕션이 아니라 하게 됐고, 7월 할리웃보울 공연도 때마침 펜싱 선수인 아들의 중요한 토너먼트가 네바다에서 열리기 때문에 기회가 맞았어요. 그때 한인 팬들을 다시 뵙게 되길 기대합니다.
■ 공연 리뷰
마크 모리스 댄스그룹‘알레그로, 펜세로소, 모데라토’
무용+음악+문학+미술
아름다운‘퓨전 향연’
두 시간 내내 ‘아름답다’는 탄성이 수없이 터져 나온 공연이었다.
지난 5~8일 뮤직센터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열린 마크 모리스 댄스 그룹의 ‘알레그로, 펜세로소, 모데라토(L’Allegro, il Penseroso ed il Moderato)는 무용, 음악, 문학, 미술이 한 무대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공연예술의 극치였다.
24명의 무용수들이 쉬지 않고 추어낸 몸짓은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동작, 인간 감정의 표현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지를 보여주었고, 헨델의 음악은 클래식 오라토리오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화려한 음표의 향연이었다. 특히 홍혜경과 새라 코번, 테너 배리 뱅크스, 베이스 존 렐이아 등 세계 정상급 성악가들이 LA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과 함께 펼친 연주는 순전히 음악만으로도 더 이상 좋을 수 없었는데, 지휘자 그랜트 거숀이 조련해낸 훌륭한 음악이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또 윌리엄 블레이크의 수채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무대는 아주 단순한 세트에 색상의 변화만으로 장면의 흐름을 이끌어갔는데 무용수들의 의상과 조화를 이룬 그 색들이 어찌나 예쁘고 아름답던지 장면 장면이 그 자체로 그림이었다.
한 가지 너무도 안타까웠던 것이 노래 가사로,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저 음악의 분위기만 느끼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 작품은 존 밀튼의 시에 헨델이 음악을 붙인 것으로, 영어로 쓰인 시를 영어로 노래하기 때문에 자막 처리를 하지 않았다. 일반 영어도 노래로 하면 알아듣기 힘들지만 고어와 시어가 많이 섞인 문학작품이라 그 아름다움을 듣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1988년 ‘알레그로, 펜세로토, 모데라토’를 창작, 가는 곳곳마다 극찬을 받아온 마크 모리스는 모든 무용공연에 라이브 음악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한 인터뷰에서 “밀튼의 시가 바로 이 작품의 뮤즈, 이 작품이 존재하게 된 이유였다”고 말하고 “춤으로 표현하기에 완벽한 시이며, 음악 또한 그것을 완벽하게 빛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홍혜경은 이날 그녀 특유의 서정적이고 유려한 음색으로 매혹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그녀는 어떤 무대에서도 다른 공연자들을 압도하는 우아하고 성숙한 스타 파워를 내뿜는다. 보기 좋고 자랑스럽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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