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미국에서 유학하던 박희덕 회장께서는 당시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두 발로 직접 뛰어 다니며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식당이라는 식당은 모두 들어가 혹시 일할 사람을 구하는지 물어 보았다고 한다. 결국 그가 처음 시작한 일은 미국에서 가장 굿은 일 중 하나인 레스토랑 유리창 청소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깐, 한국에선 전혀 해본 경험이 없던 터라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해고되었다. 당시 레스토랑 주인은 그를 불러 시간당 1달러 10센트를 8시간으로 계산해 하루치 임금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세금을 제한 나머지 6달러 남짓을 한 손에 움켜쥐고 밖으로 나온 그는 머나 먼 타국에서 얼마나 서러웠던지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정처 없이 거닐다가... 오션 비치(Ocean Beach)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고국을 바라보며...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후에 한국에서 유학을 오는 학생이 있으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그간 알아뒀던 일자리를 직접 알선해 주는 것은 물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그 방법까지도 상세하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60년대 초 패기 넘치고 전도유망한 한국의 젊은 유학생 박희덕은 자정부터 아침 8시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바닥 청소, 유리창 청소, 접시 닦기 등 각종 허드렛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침에 자취방에 도착하면 간단히 세수만 하고 난 후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주경야독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야경주독(夜耕晝讀)’을 한 셈이다.
박 회장께서 ‘갓 파더’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그가 아파트를 청소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아파트 관리인이었던 그는 건물 지하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한방에 2-3명씩 자취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도 넉넉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한국 유학생들을 도와주려 하였고 또 매일 아침, 저녁까지 기꺼이 제공하는 후덕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박 회장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한 한국 학생들은 그를 ‘갓 파더’로 부르기 시작했다. 잠깐 지난 추억을 회고하며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짓던 박희덕 회장님은, 당시의 한국 학생들은 모두 성공했고 또 대부분이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서로가 연락하면서 가끔씩 만남의 기회를 가진다고 한다.
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고 있던 박희덕 회장은 1971년부터 근 10년 동안 라디오 방송국 대표로 있으면서 ‘가주 한국의 소리 방송’을 직접 제작, 방송하였다. 그는 매주 1시간씩 한국 교포들과 관련된 내용 등 다양한 소식을 미국 방송채널(KBRG)을 통해 한인들에게 전달했고 또 한 달에 한 번씩 미국 영화관을 빌려 한국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당시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국이 그리웠을 한국 교포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음은 익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또한 그는 북가주에서 고교, 대학 동창회와 교회 단위로 하는 한인 야구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했는데, 그 전통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고 지금은 야구협회가 주관하고 있다고 한다.
1975년 그는 북가주 사상 처음으로 골든게이트 공원(Golden Gate Park)에서 한인 대운동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약 400여명의 교민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북가주 한인 운동회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청군 백군으로 나눠 성공리에 진행되었고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한국 비행기 왕복 티켓은 물론 쌀, 라면, 칫솔 치약 등 한국 기업들로부터 협찬 받은 푸짐한 상품이 지급되었다. 박 회장을 잘 아는 주위 분들은 당시 그가 사비까지 들여가면서까지 한인들을 위해 운동회를 정말 알차게 준비했다고 살짝 귀띔을 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한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축제의 한마당을 이루었던 당시의 한인 운동회가 단발성 행사로 그치고 말아 지금도 아쉬움이 많다고 한다.
초기 이민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박 회장께서는 미국으로 오는 많은 한국인들을 자기 가족처럼 도와주고 있다. 북가주 지역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그래서 베이 지역에서 그를 알고 있는 많은 한인들은 박희덕 회장님을 부를 때, 샌프란시스코를 줄여서 그냥 “샌프란 갓 파더(San Fran Godfather)”라고 부른다. 항상 고국을 잊지 않고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그분은 샌프란시스코의 진정한 대부(代父)이다.
(한국외대 교수/UC버클리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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