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서울 도심을 누비는 한국의 자동차 문화와 관련해 3가지로 요약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이 새 차이고 중대형차이고 또 한국산 자동차라는 것이다. 이 말을 바꾸어보면, 서울에는 오래된 자동차와 소형 자동차를 찾아보기 힘들고 또 외국산 자동차도 거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수입차 시장 개방 20년 만인 2007년 사상 처음으로 한국의 외국산 자동차 연간 수입량이 5만 대를 넘어섰고 특히 올해는 수입차 판매량이 12만 대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돼 더 이상 외제차와 관련된 내용은 맞지 않을 듯하다. 실제로 작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팔린 승용차 10대 가운데 1대가 수입 자동차였다.
미국에 온 후, 필자도 캘리포니아의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우선 미국 시장에서 일본이 엄청나게 많은 자동차를 판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그동안 미국 자동차 업계의 ‘빅3’는 80년대 자국의 자동차산업 위기상황을 간신히 벗어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뭐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세계 제1의 부자 나라인 미국에서 무려 30년 아니 그 이상 된 자동차가 버젓이 도로를 누비며 질주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필자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신형 자동차를 구입할 여건이 되지 않는가 보구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중산층으로 보이는 미국의 한 중년신사가 자신의 30년 된 베엠베(BMW)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자동차 겉모습은 오래되고 낡았지만 내부를 잘 정비했는지 아주 튼튼해 보였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미국인 특유의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 정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교도 정신(Punitanism), 개척자 정신(Frontier Spirit)과 함께 미국의 3대 건국정신 중 하나인 실용주의 정신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알바니(Albany) 시에는 산 파블로(San Pablo)라는 중심도로가 있고 그 대로변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즐비해 있다. 그런데 이곳의 상점들은 한국의 상점들에 비해 겉보기에는 간판도 작고 허름해 보이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전문적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품들이 빼곡하게 잘 진열되어 있다.
작년 7월 초, 방학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샌디에고에 있는 친지 댁에 머물면서 인근 동물원 등을 방문하였다. 원래 필자는 한국에 있을 때에도 서울 근교에 있는 놀이동산이나 동물원에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규모가 너무 클뿐더러 사람에 치여 미처 다 돌아보기도 전에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놀이공원 한 중간에서 아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업고 주차장까지 와야 하기 때문에 놀이동산, 동물원하면 이제는 아예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그렇지만 아내가 애들 교육상 가는 거라 말하면 어쩔 도리가 없는데, 작년 샌디에고에서도 내심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아 우선 마음이 놓였고 또 한국에서 만큼 그렇게 붐비지 않아 좋았다. 특히 샌디에고 동물원(San Diego ZOO)의 경우,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동선마다 구경할 동물들이 있어 방문객들의 한걸음 한걸음이 헛되지 않게 섬세하게 잘 설계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레고랜드(LEGOLAND)는 물론이고 씨월드(SeaWorld)도 가는 곳곳마다 정말 내실 있고 알차게 꾸며져 있었다. 방문하는 곳 마다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난 후 아내와 나는 만약 어느 한 곳이라도 건너뛰었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것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미국처럼 땅이 넓은 나라에서 규모만을 생각했다면 몇 배 아니 몇 십 배라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어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그 규모를 적절하게 정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겉은 화려하지만 그 속을 살펴보면 내실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실용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미국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그런 것 같지만 아주 내실이 있다는 생각이다. 35년 된 BMW 자동차도 그렇고 거리의 상점들도 그렇고 씨월드나 샌디에고 동물원 등도 그렇고...
한국외대 교수 / UC버클리 객원교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