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봄비가 질금 질금 내리던 지난 달 중순, 또 한 사람의 내 친구가 떠나갔다. 이 같은 헤픈 표현이 마치 유행가 가사 같이 들릴는지 모르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송대관이 부른 노래 ‘유행가’의 가사처럼, 유행가 같은 거니까 말이다.
그날 저녁 친구를 떠나보내는 영결식장으로 행하는 차창 밖에는, 하염없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는 어쩌면 풍진세상(風塵世上)을 떠나가는 그의 길을 촉촉이 적셔 주는 비 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인생말기에 병고로 고생하다 갔기 때문에 말이다.
나와 82살 동갑내기 친구 김동기! 그는 나와는 초등학교 코흘리개 친구도, 중학교 시절의 같은 반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학 동창도 아니다. 그와 나를 친구란 끄나풀로 맺어 준 건 연극(演劇)이었다.
6.25가 일어 난 그 다음 해, 그와 나는 우리의 고향인 통영에서 정훈공작대(政訓工作隊) 연극반을 조직하여, 국군장병 위문공연을 위해, 통영을 비롯해서 가깝게는 욕지도, 멀리는 하동, 삼천포, 그리고 여수까지, 한려수도(閑麗水道)의 파도를 가르며, 1년 가까이 배를 빌려 타고 다녔던 것이다. 그 때 공연한 작품 또한, 내 고장이 배출한 우리나라 연극계의 대부(代父)인, 유치진 선생의 ‘장벽’ 이었으며, 이 연극에서 그와 나는 대결(對決)하는 상대역을 맡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연극의 연습기간과 공연기간 동안, 내가 그에게서 배운 값진 게 있다면 그건, 정확한 대사(낱말)의 발성법(發聲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낱말 구사에 있어서의 장음과 단음(길게 혹은 짧게),고음과 저음(높게 낮게) 그리고 청음과 탁음(맑게 탁하게)의 발음을 정확하게 배웠다는 그 말인 것이다.
언어 구사에 있어서 특히 경상도 사람들이 유별나게 취약점을 들어내는 현실에서, 통영 출신인 그가 남달리 정확한 낱말을 쓰게 된 까닭을 든다면, 그가 일찍이 서울의 배재중학교에 진학한 것과, 이어 중앙대학 국문과에서 공부한 점에서 인지도 모른다.
그가 중대 2학년 때인 6.25 전 해, 개최했던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에, 아일랜드 극작가 존.싱의 작품 ‘바다로 가는 기사’(Knight to the sea)를 연출하여 대상을 받을 만큼 그의 연출 솜씨는 대단했었다. 그 때 그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최무룡’은 나중에 유명 배우가 되기도 했고, 또한 이 지역에서 성공한 기업인 이종문(엠백스 사장)씨도, 그 때 그의 연출을 받았던 한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친구 동기에서 배운 정확한 발성법 덕으로, 후일 내가 평생을 두고 걸어 온 아동극 활동에 있어서, 출연 어린이들에게 대사의 정확한 발음을 지도할 수 있었던 기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최무룡이 어느 배우 못지않게, 정확한 대사를 구사한다는 정평을 얻게 된 것도, 바로 내 친구 동기의 영향력이 컸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날의 연극을 통한 그와 나의 끈끈한 우정은, 그 후 그가 우리나라 으뜸 극단인 신협(新協)에서 연극 활동을 했을 당시, 그리고 내가 통영 바닥에 머물면서, 6.25 가 발발하던 바로 그 날, 중앙국립극장에서 공연했던, 중국 극작가 조우의 작품 내우(雷雨)를, 내가 제작비를 대는 한편, 그 연극의 주인공인 주 평(周萍) 역 까지 맡아 공연 했을 때, 나의 상대역이었던, 그 때의 동기의 연인이자, 지금의 미망인인 S양이, 동기의 오해와 착각으로 첫 날 공연에 출연하지 않으므로 해서, 나는 경제적으로 크게 결손을 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버지에게 내쫓김을 당함으로써, 나는 의학도의 길에서 벗어나, 긴 세월 동안 소위 말하는 ‘딴따라’의 길을 걸어오게 되었고, 그는 연극의 길에서 목사의 길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그와 나의 서로 다른 숙명적인 인생항로의 방향전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와 나는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어느 날, 미국 하고도 실리콘밸리 골짜기에서 같은 이민자의 모습으로 고향 까마귀가 아닌, 고향 갈매기(내 고향 통영을 상징하는 바닷새)로 해후(解逅)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땀땀이 만나 곰탕 국물을 훌쩍이며, 지난날의 극적인 사연을 한갓 추억담으로 주고받으며, 껄껄 거리며 웃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나의 신작인 성인 연극 ‘소쩍새’의 연출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그가 그렇게도 기뻐했었는데, 그는 영원한 길로 가버린 것이다. 그가 간 이 시점에서, 세상적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만일에 그가 계속 연극의 길을 걸었더라면, 그는 분명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연출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도 또한 통영을 빛낸 예술인으로 기록 되었을 것으로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지난 날 연극무대에서 나의 상대역으로, 또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 놓았을 뿐 아니라 주 평 (周萍)이란 필명을 달게 한 친구 동기에게 “친구야, 오는 5월에 내가 고향 통영을 찾아 가면, 너와 내가 바라보던 미륵산 산자락과, 한려수도를 배질 해 가는 돛 단 배의 낭만적인 뱃길질을 보고 오마!“ 라고 그가 없는 무대에서 내 혼자만의 독백(獨白)을 뇌어 보는 것이다.
(아동극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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