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희 교사(뉴커머스고교·뉴욕한인교사회 특수교육분과위원장)
주말 직전 뉴욕 일원에 엄청난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들 에반이와 학교에서 치료센터로 훨훨 날아다니던 에너지가 몸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 밀려온다. 그렇게 ‘에너지 제로’의 상태가 내 몸에 찾아오면 뼈 속에 줄을 서 있던 명랑·상쾌·긍정이란 내 자아 속 친구들은 배신을 하고 잠을 자러 가기도 하고 좀처럼 모습을 보기 힘든 또 다른 자아인 철학자 자아가 무거운 발걸음을 끌며 나타나곤 한다. 철학자 자아가 나타날 때면 마치 내게 ‘아들 에반이가 자폐란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달라진 내 모습을 살펴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명랑·상쾌·긍정의 자아 친구들과 함께할 때는 그런 생각을 해볼 시간도 없지만 김치를 담근 반찬통에 끓인 보리차를 담아 식히다가 김치향이 강력하게 풍기는 보리차를 우아하게 폼 잡고 마시는 날이면 에반이로 인해 변한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개구리처럼 쭈글쭈글한 조그만 것이 내 자식이라고 태어나자마자 품에 안겨졌을 때 밀려왔던 그 온몸 충만한 따뜻함은 부모라면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다. 이후 에반이가 점점 살이 통통 올라가며 성장해가는 순간순간마다 내 마음 속에는 에반이에 대한 꿈도 그 누구도 막지 못할 속도로 무지막지하게 커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요 녀석, 이렇게 발을 쭉 뻗는 것이 완전 축구선수 감이군!’ ‘젖 먹는 집중력을 좀 보게! 세상을 놀라게 할 천재소년일세!’ 등 하다못해 이빨이 나는 것조차 여간 범상치 않아 ‘아주 말 잘하는 변호사가 되려나?’ 하며 그렇게 엄마의 꿈은 끝도 없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에반이의 자폐 장애를 인정할 수밖에 없던 그 날은 눈물범벅이 되어 눈덩이가 밤송이가 된 체험을 딱 하루하고 나니 더 이상 나올 눈물조차 없었다. 그때도 내 속의 철학자 자아가 슬그머니 나와 갑자기 내 신경마다마디를 꿰차고 있는 에반이에 대한 내 꿈이 왜 그런 꿈이어야만 했었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에반이의 발이 쭉 뻗어지는 걸 보고 누가 주변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잽싸게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겠구나, 이런 집중력과 말솜씨로는 에반이가 정말로 행복하게 살 길을 찾아볼 수 있겠구나라는 그런 꿈은 왜 꾸지 못했던 것일까를 되묻게 된다. 이전까지의 내 꿈은 에반이의 내면을 채우는 꿈이 아닌 남들이 에반이를 어떻게 보아줄까 하는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것이 컸음을 에반이가 두 돌이 됐을 무렵에서야 그렇게 많이 힘들어하며 인정하게 됐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자녀가 장애가 없더라도 누구나 책 한 권씩 쓸 만큼 수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경험 하나하나가 각자에겐 힘든 과정이긴 마찬가지다. 장애가 없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부모가 갖고 있는 꿈들이 자녀의 내면을 채우는 꿈이 아닌 외면에 많이 치중된 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시기가 너무나 나중에 찾아오게 되면서 아이를 성인으로 다 키워낸 그 순간 정말 필요한 것은 아이가 행복하게, 그리고 스스로 행복해서 그 행복을 자
신이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도 조금은 나눠주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사람인 것인데 자녀가 부모의 바람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때 끝도 없이 밀려오는 허탈함을 감당하기 벅차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하지만 자폐 장애를 앓는 에반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인 나는 에반이가 상대와 눈 맞춤하는 것조차도 일일이 배워야 하는 상황에서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에반이 스스로가 정말 행복할 수 있고 또한 가능하다면 그 행복을 다른 사람과 자기 그릇에 맞도록 나눠 갖는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지금 학교에 다니는 에반이를 지도하는 특수교육 교사들에게 ‘우리 에반이가 언제쯤이나 정상
아처럼 될 수 있을까요?’라고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은 그만 둔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아들 에반이가 다른 정상아처럼 되는 것이 더 이상 나의 바람도 아니다. 물론 이제 4세가 채 되지 않은 에반이의 상태가 좋아져 소위 정상아처럼 될 수도 있겠지만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에반이는 앞으로 어떻게 자라나던 내가 낳은 자식이기에 에반이가 필요하다면 팔이라도 기꺼이 잘라주겠노라는 엄마의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그 대가로 에반이가 언젠가는 꼭 좋아져서 그간 미뤄놨던 거대한 장래 이루고픈 꿈을 이뤘으면 하는 바람은 더 이상 품지 않는다.
에반이는 ABA 등 여러 장애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자신을 변화시켜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과 섞여 행복한 사회생활을 하도록 스스로 준비 중에 있다. 나 또한 부모로서 그렇게 열심히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커가는 에반이를 지켜보면서 언젠가 내가 에반이의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올 때, 그래서 에반이가 혼자서 살아남아야 할 때, 에반이처럼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이 지금보다 조금은 따뜻해지도록 만들겠다는 목표로 스스로 과제 풀기를 시작해 나갈 결심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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