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각으로 쌓은 아치탑
그 다음 옐로스톤의 남쪽입구를 지나 John D. Rockefeller, JR Memorial Parkway로 들어섰다. 티톤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싶어 52스퀘어마일의 땅을 사서 기증한 록펠러를 기려서 명명한 도로다. 미국의 알프스로 불리는 그랜드 티톤 공원엔 로키산맥의 줄기 가운데서 4197미터로 최고봉인 티톤 산이 있다.(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인 뾰족한 산 그림이 바로 이 산이다) 그 티톤 산을 중심으로 빙하를 이고 있는 산들이 12개나 쭉 이어져 있는데, 동쪽은 급경사고 서쪽은 완만하단다. 그런 관계로 여름에도 햇볕 드는 곳만 녹다보니 알프스의 경관처럼 연중 눈이 쌓여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남북으로 늘어서있는 하얀 면사포 쓴 고봉들의 장관은 옐로스톤을 능가한다더니 내 눈에도 그렇다. 길이가 40마일, 폭 9마일의 공원 안엔 빙하가 남기고간 호수가 8개나 있다.
티톤 호수도 너무 커 두 눈만으로 담기엔 역부족이고. 무스들이 5월이면 이 호수에 낀 이끼를 먹으러 많이 모여든다지. 산의 눈이 녹아 잭슨호수에 물이 넘치면서 흐르게 된 스네이크 강이 말없이 따라온다. 뱀처럼 S자로 이어져 흐른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스네이크 강
은 미국에서 급류타기론 첫 손에 꼽힌단다. 인제 와이오밍주에서 스키로 알아주는 잭슨 홀까지 가는 동안 영화 ‘Shane’을 보았다. 원체 명화이기도 하지만 ‘쉐인’을 바로 잭슨 홀에서 찍었기 때문이다. 마침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영화였는지 하얗고 푸른 산의 로고가 나오는데 진짜로 차창 밖에 산과 똑같다. 완전 판박이 실물이다. 주제곡이 흐르는데 가슴이 찌릿해온다. 학창시절 18번이었던 ‘에덴의 동쪽
‘과 ‘쟈니 기타‘ 등으로 만인이 가슴을 촉촉하게 젖게 했던 빅터 영Victor Young>의 ‘먼 산울림’이다.
"대초원에 땅거미가 진다. 낮이 끝나 태양도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밤에도 날 부르는 메아리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네./……/ 나는 저 머나 먼 산이 부르는 메아리에 따라야한다네"로 끝나던 노래였다. 만인에게 애청 애송되었던, 내가 무지 좋아했던 곡인데, 어떻게 그리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정말 세월의 힘은 무섭다. 설명이 필요 없는 명화에다 본적이 있던 터라 자막도 안 나오고 오디오도 멀지만 상관없다. 그림만 봐도 짠하다. 보고 또 봐도 바로 눈앞에 있는 설산의 봉우리들과 영화 속의 봉우리들이 딱 복사판인 게 암만해도 너무 신기하다. 1953년에 찍은 영화니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티
톤산은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그렇건만 영화 속에 나오는 배우들은 메아리 따라 머나먼 곳으로 스러졌다. 특히나 엔딩에서 "쉐인!" 하고 외치던 죠이역의 그 꼬마도 아깝게 1972년 30세 한창 나이에 콜로라도 덴버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지. 나는 또 어떤가. 몸도 얼굴도 이리 폭삭 간 채로 앉아있다. 산천은 그대론데 사람만 이렇게 늙고 떠나간다. 영화에 설봉이 나올 때마다 창밖의 실물을 보며 화면을 보니 더욱 현실감상실이다. 영화의 잔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잭슨 홀에 도착했다는 바람에 아쉽게도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어느새 130Km나 달려서 로키산맥의 일부인 티톤 산맥의 중심 그랜드 티톤에 들어섰단다. 해발 3500m에 위치한 산들의 품안에 쌓여있는 잭슨 홀은 산간분지에 형성된 도시치곤 번화하다. 고즈넉하면서도 시골티가 별로 안 난다. 워낙 세계적인 스키장의 유명세 덕이다. 그러잖아도 산등성이에 설치된 스키시설들이 보란 듯이 위용을 떨치고 있다. 해질녘, 역사가 깊다는 식당에 갔는데, 온통 박제된 무스의 머리나 곰들의 인테리어로 야생적인 분위기가 물씬하다. 산이 깊어 사슴종류들이 워낙 많이 잡히나보다. 중심가 공원엔 Bull Elk나 Bull Moose, Mule Deer뿔을 하얗게 탈색해 탑처럼 첩첩히 포개쌓아 아치를 만들어 놓았다. 자그마치 4개나. 차창을 통해 봤을 땐 하얀 나무 가지들을 다듬고 구부려 쌓아올린 예술작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한국 사람들의 선호대상인 녹각들이다. 빽빽하게 얽혀 붙여 추정 불가능한 엄청난 개수에 질릴 지경이다. 전율이 인다. 차라리 자연 친화적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으면 운치나 있었을 텐데. 끔찍하게 많은 사슴들의 죽음과 뿔 임자들의 선한 눈망울만 떠오른다. 원래 동물이나 새의 박제품을 혐오하고 볼 때마다 소름이 돋곤 했는데, 이건 말하자면 뿔 박제품 아닌가. 만든 발상 자체가 예술은커녕 살벌하게 느껴진다. 이른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만행이니까. 그래서 ‘쉐인’을 통해 아련하게 그렸던 그 촬영지 잭슨 홀의 이미지가 팍 바뀌었다. 사냥과 거친 야성의 이미지로.
셋째날 밤, 첫날 묵었던 포카텔로로 원점 회귀했다. 밤 9시 넘어 도착했지만 다들 모여 마지막 밤의 아쉬움을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달랬다. 다음날 아침, 떠나는 날은 다시 축구의 날이다. 대망의 8강 진출이냐 아니냐가 판가름 난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은 축구로 시작하고 축구로 끝나는 셈이 됐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관전하길 원했지만 한 여행객의 비행스케줄 사정상 전반전만 관전키로 했다. 우리는 또 한방에서 함께 시청하다가 1대0으로 진 상황에서 버스에 올랐다. 축구마니아인 가이드의 와이프께서 ‘월드컵 통신원’이라, 공만 들어가면 전화벨이 울리게 돼있다는데 계속 잠잠하다. 고대하는 소식이 없음에도 가이드는 열심히 ‘강의’중인데, 갑자기 내 뒷자리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졌다. 동시에 애타게 기다리던 벨이 울렸다. 젊은 여행객이 스마트 폰으로 계속 축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한 마음이 돼서 버스가 흔들리도록 환희에 찬 소리들을 질렀다. 야속하게도 거기까지였지만...
차창으로 멀리 솔트레이크시티의 북서쪽으로, 빙하기에 형성된 호수 솔트레이크가 보인다. 16Km라더니 무지무지 넓다. 이 지구상에 요단강이 두개란다. 이스라엘의 사해와 갈릴리해로 흐르는 강과 여기 솔트레이크와 유다호로 흐르는 강이다. 그런데 이 솔트레이크의 소금기가 25%로 보통 바다 염도의 8배고 사해보다 더 진하단다. 이 호수의 소금 매장량이 약 60억 톤이라나. 그렇게 짠 농도의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물고기가 많다니 신비스럽다. 물고기의 생존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공항가기 전에 몰몬 성전을 구경했다. 예상보다 거대한 성전의 경건함과 아름다움에 은근히 놀랐다. 40년에 걸쳐 완성된 빌딩답게 장중하고 돋보였다. 세계 100가지 걸작품의 하나로 꼽힌다더니 충분히 납득이 간다. 철근을 하나 사용 않고 나무못이나 생가죽, 고리나 흰 대들보로 건축했다는 돔형의 태버네클이란 대 예배당에 갔다. 대형파이프오르간과 핀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는 최고 수준의 음향설비로 유명하단다.
마지막 에피소드 하나. 공항에 일찍 도착해 두 시간 넘은 기다림 끝에 탑승했는데 30분도 넘게 안 뜨더니 나가란다. 제공된 티켓으로 샌드위치를 사먹으며 무려 4시간 30분을 또 대기했다. 멀고도 먼 집을 향해 가는 길이 어찌 그리 힘들던지. 가까스로 케네디 공항에 내린 시각이 새벽 3시도 넘었다. 그러나 이 고생조차 추억이 될 것이다. 즐겁던, 고생이던, 기억의 창고에 쌓이면 달콤한 그리움으로 남는 법이니까.
에필로그: 이번 여행으로 조금은 지질학에 입문한 기분이다. 옐로스톤은 지구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증명하는 지질학적 공원이자 지질박물관인 셈이었으니까. 지질학자들은 옐로스톤의 칼데라는 활동이 중지된 게 아니라 언제든 다시 분화할 걸로 추정한단다. 최근에도 중앙부분이 붕괴되며 30-45마일에 이르는 새로운 칼데라가 형성됐다지 않는가. 언제 무슨 변화가 올지는 오직 자연 마음대로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는 자연만 알 뿐이다. 어떤 벌로
어떤 재앙으로 나타날지는 그 누구도 예측불능이다. 나는 그 현장들을 접하며 잠깐잠깐 ‘당장 무슨 일이 터지는 것 아냐?’ 오싹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모든 기이한 현상들은 끔찍한 상상력까지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명백한 산증거들이었으니까. 우리 모두 자연 앞에 좀 더 겸허해져야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여러모로 도움이 된 박식하신 가이드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여행을 준비하고 함께 호흡하며 예쁜 추억을 쌓은 10명의 멤버들도 고맙다. 글 쓰는데 도움 되라고 책자를 챙겨준 친구들의 헤아림도 새롭게 다가온다. 내 디카가 문제가 생겨 사진을 많이 못 찍었는데, 사진 찍은 걸 이메일로 전송해준 배려 깊은, 준 사진작가 친구 S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모두 다 삶의 더불어 사는 즐거움이자, 여행이야말로 필요불가결한 요소란 걸 다시금 되새기며...<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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