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맞은 격변기는 22년 전 동유럽에 불어닥친 거대한 변혁의 물결을 연상케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40여년 넘게 지속해온 공산당 독재체제가 한순간 도미노처럼 무너져내렸듯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도 수십 년간 권력을 휘둘렀던 독재정권이 차례로 몰락하거나 그럴 처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89년 격동을 거쳐 체제 변혁으로 귀결됐던 동유럽의 역사적 경험이 민주화 시위가 몰아치는 오늘의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재연될지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989년 동유럽의 정치적 격변과 지금 중동의 정국은 많은 점에서 닮았다.
특히 장기 독재정권의 철권통치에 의한 억압과 경제난에 오랫동안 꿈틀대던 변혁의 물결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촉발돼 봇물 터지는 듯한 모습은 더욱 그렇다.
동유럽의 체제 전환은 1989년 4월 폴란드 공산정권과 당시 불법단체였던 자유노조가 이른바 `원탁회담’ 협상 끝에 자유노조의 의회 진출 허용에 합의한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그해 6월 실시된 총선에서 자유노조가 의회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공산당 1당 지배체제를 종식하고 동유럽 공산정권 몰락의 서막을 장식했다.
당시 공산정권 인사들은 이 `합의’가 나중에 이런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9월 헝가리는 자국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려는 동독인들을 국경에서 붙잡지 않았고, 그로부터 2개월 뒤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벨벳혁명’,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몰락과 처형 등이 뒤따랐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동유럽 체제 전환, 냉전 시대의 종식, 다극화 세계 등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올해 중동 민주화 시위도 튀니지의 작은 도시에 사는 노점상 청년의 분신자살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건에서 시작됐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해 청과물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이 청년이 시당국을 찾아가 민원을 제기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청사 앞 도로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그의 분신 소식은 튀니지 전역으로 퍼지면서 반(反)정부 시위를 일으켰고 결국 23년간 철권통치해온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부패로 얼룩진 장기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와 만성적인 실업 등 생활고가 주민들의 억눌린 심정을 폭발시킨 것이다.
이집트에서도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 고무돼 무슬림의 금요기도회를 `분노의 금요일’로 바꾸면서 30년간 권력을 휘두른 `현대판 파라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냈다.
독재권력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의 욕구와 더불어 경제난이 시위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대목도 동유럽과 다르지 않다.
체제 전환 직전의 동유럽 각국은 옛 소련 지원 계획경제 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궁핍한 삶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쌓여왔다.
그럼에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 물결이 지향할 지점에 대해서는 섣불리 동유럽의 경험을 적용하기에는 이르다.
동국대 박명호교수(정치학)는 "동유럽은 공산독재국가였고, 지금의 중동은 왕정이나 군부독재라는 점이 다르다"면서 "중동에는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종교가 시위 확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유럽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같은 시기에 모두 소련의 공산정권 영향권에 일제히 편입된 까닭에 정치체제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행로를 거쳤다.
하지만,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많은 공통분모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종파 간의 갈등이나 숨 막힐 정도로 엄격한 이슬람식 지배 체제에 대한 불만 등 개별 국가마다 고유한 사정이 겹쳐 복잡한 양상을 띤 측면이 있다.
공화정과 왕정 등 정치체제도 다양하고 각국 지배 세력의 대응방식도 각양각색이다.
정치체계뿐 아니라 지배체제와 연결되는 종교적 요인 `이슬람’이 있는 까닭에 동유럽의 민주화 도미노를 잣대로 지금의 중동 정국을 보는 데 한계를 지닌다는 뜻이다.
모든 역내 국가들이 예외 없이 서구식 `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로 정리됐던 동유럽의 경험이 향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재연될지는 아직 불투명한 셈이다.
미국 등 서방에서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정교분리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터키식 모델을 민주화 혁명 이후의 중동 각국이 채택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슬람은 중동 정치치제 재편에 중요한 변수임이 틀림없다.
(부다페스트=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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