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대학은 한국사람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비즈니스 전공으로는 미국내 top 5% 에 들 정도로 괜찮은 대학이었고 역사 또한 오래되어 (1862년 개교) 백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대학이다. 내가 지금도 크게 후회 하는 것은 왜 아이비 리그에 원서를 안넣었을까 하는것이다. 대학 가서 만난 많은 수의 아이비의 한인학생들의 영어가 나와 대동소이했지만, 명문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서로간 인생 유전이 너무 달랐다.
이것이 내가 우리 아이 다섯을 하버드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다. 왜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 되는지 이 글 말미에 다시 얘기하려 한다.이민 온 고등학생으로 많은 직장 경험과 또 학교 내에서 적극적인 클럽활동, 그리고 Ethnic민족에 대한 특혜 등등으로 나는 많은 장학금을 all white college인 Bryant College를 가게 되었다. 보통은 학교 입학식을 하게 되면 모든 가족 친지들이 같이 가 축하 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상상이겠지만 그 당시 이민 온지3년째인 우리 가족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갈 때라 하루 종일 일에 지쳐서, 밖에서 혼자 살아가는 막내 동생이 대학에 가는지 마는지 알 겨를이 없을 때다.
입학 날짜가 되어 지도를 보고 속칭 “똥차”를 몰고(지금은 찾을 수도 없는 Ford Vega) 난생 처음 처음 2시간 넘게 홀로 운전을 하고 입학식을 하러 갔는데 이 대학시절을 통해 나는 왜 사람들이 외로움으로 자살도 하는지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미국의 백인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에게 관심은커녕 거리감과 조롱감으로 대하기가 다반사였다. 예를들면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 살며 나는 매번의 식사 때마다 넓은 테이블에 혼자 식사를 했었어야 했고, 그 좋아하는 농구를 하고 싶어도 아무도 자기 팀에 동양인인 나를 뽑아주지 않아 홀로 농구대를 벗 삼아 플레이 하곤 했다.
미국 대학의 주말 기숙사는 시험 때를 제외하면 보통은 파티로 인해 광란의 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나는 그 시끄러움 속에서 홀로 공부를 하고 있을 때면 외톨이라는 생각에 많은 정신적인 방황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왜 자신이 미국에 있는지 왜 다른 인종 속에 섞여서 혼자라는 존재의 의미를 그렇게 뼈저리게 느껴야 되는지 후회를 해도, 나에게는 어떠한 선택권이 없었다. 어정쩡한 나이에 가족에 이끌려 이민 온 나는 의논할 상대도, 그 심한 외로움과 고통을 나눌 상대도,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려서오면 미국에 쉽게 적응을 했을것이고 또 늦게 왔으면 어른의 정신연령으로 인생을 새롭게 개척한다는 생각으로 즉 돈을 번다는 일념으로 삶에 매진 했겠지만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의 나는 홀로 생활을 꾸려가면서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또 한편으로는 이민사회보다 더 폐쇄적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대학 생활 적응이 그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유학생이었다면 학교 졸업후 금의환향의 꿈도 있었겠지만 1.5 이민세대인 내게는 돌아갈 곳도 없는 그저 긴 고통의 시간이었을뿐이다. 후에 결혼을 하고 간혹 꿈을 꿀 때면 이런 대학시절의 어려움이 되살아나 침대 시트가 젖곤 했다. 내게는 긴 악몽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어렵게 시작한 대학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등학교 때보다 더 어렵고 많은 가짓수의 교재와 과목등으로 수업에 처지기 시작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책을 달달 외우는 것이었다. 시험때가 되면 나는 교수가 언급한 책의 중요 부분을 10페이지건 50페이지건 며칠이고 걸쳐 외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에세이 문제의 답으로 유사하게 쓰곤 했는데 나의 상황을 아는 교수들은 이런 나의 노력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기도 했지만 이해 못하는 교수들은 나의 작문에 형편없는 점수를 주곤 했는데 이런 것들이 계속 겹치며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장학금을 더 이상 못 받게 되었다.
항시 파트타임 잡을 2~3개 뛰면서 생활 하며 소소한 학교 경비도 대곤 했지만 학비 전액을 부담한다는 것은 당시 내 형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2년을 다닌 후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게 되었다. 많은 실망과 절망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기숙사를 나와 직장 생활을 하게되었다. 이 시기는 수많은 암담한 시기들 중의 한 부분이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아 그 다음 학기에 재등록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1년 반은 3개의 파트타임 일을 해가며 어떤 학기는 6~7 과목을 택하고 어떤 학기는 나이트 과목을 택하곤 하며 나의 입학동기들과 같은 시기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학기당: 3credits x 5과목이 정상).
즉 3년 반만에 대학을 졸업하는데 그것을 이루면서 느낀 고통과 외로움이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번에 하원의장이 된 John Boehner 가 매번 본인의 학창시절을 언급할 때면 신문 방송 가리지 않고 눈물을 보이곤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대학 시절의 스토리는 책으로 쓸 만큼 많지만 다음 회부터는 나의 첫 사업 스토리로 넘어간다. (계속)
브루클라인 하이스쿨의 졸업식장에서 필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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