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29일에 발생한 LA폭동은 100여년이 넘는 미주 한인이민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폭동 당시 기자는 한인들의 피해현장을 취재하면서 극도의 무력감과 허탈감을 느꼈다. 한인들이 리커와 마켓, 스왑밋 등 스몰비즈니스를 많이 운영했던 흑인 밀집거주 지역 사우스센트럴은 백주에도 흑인 폭도와 일반 시민들까지 가세해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금도 경찰을 비웃기나 하듯 희희낙락하며 업소의 물건들을 약탈해 가던 그들의 득의만만한 표정이 떠오른다. 과연 ‘이곳이 미국 맞나’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 시간 경찰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나?
폭도들은 결국 LA 한인타운까지 침범해 타운의 주요 상가를 약탈하고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작 흑백갈등과 빈부격차 등의 문제 때문에 폭동이 발생했지만 한인사회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wrong time wrong place)는 이유로 1명이 사망하고, 2,300여개의 업소가 불타거나 약탈당했고, 무려 3억8,000만달러 상당의 재산피해를 입었다. 주류사회는 폭동이 마치 한흑갈등 때문에 발생한 것처럼 여론을 몰아갔고 정치인들은 폭동 피해 한인업소들의 재기에도 불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했다. 그러나 한인사회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폭동이 발생했던 그해 가을 선거에서 한인사회는 미주 한인이민 역사상 최초로 김창준씨가 연방 하원의원에, 정호영씨가 가든그로브 시의원으로 당선되는 정치적 쾌거를 이뤄냈다. 폭동 당시 미 주류 전자스토어에서 매니저로 일했던 강석희 현 어바인 시장도 LA폭동에 충격을 받아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당시에 정치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중국계 커뮤니티는 김 의원의 당선에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정치력 신장 캠페인을 시작해 현재 LA카운티 기준으로 주 하원의원 이상이 10여명, 시의원 30여명에다가 조세형평국 위원 및 주재무감사 등까지 합치면 60여명의 정치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중국계 커뮤니티는 어떻게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정치력 신장을 이루게 됐는가? 지난 1993년 유권자 등록을 격려하는 ‘중국계 미국인 정치력 신장연합’(CAUSE, Chinese American United for Self Empowerment)을 결성해 꾸준히 중국계 차세대 리더를 발굴하고 훈련한 결과였다.
기업인 등을 중심으로 발족된 ‘100인 위원회’는 재정적으로 CAUSE의 활동을 지원했다. 이같은 움직임이 결국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80-20’이라는 단체로까지 발전했으며 전국적으로 등록된 회원 만해도 60만명에 이를 정도까지 성장했다. ‘80-20’ 아시안 정치단체는 아시안들의 투표권을 한 정치인에게 몰아주어 아시안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을 선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제 경제적으로 안정된 한인 커뮤니티의 중차대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 ‘정치력 신장’이다.
이를 위해 유권자 등록으로 한인 선거인의 규모를 확대하는 등 미 주류사회에 한인들의 수적인 규모와 정치파워를 표출시키는 일은 미주 한인사회가 당면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또한 지속적으로 한인 정치인이 배출되어야 한다. 한 명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 배출은 정치력 향상을 위한 그 어떤 행위보다 파급력이 크고 강하다. 그러나 한인의 정치력 신장은 정치인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이민 1세기를 넘긴 미주 한인사회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한인 전·현직 정치인과 공직자, 한미 정계 지도자, 차세대 리더 등이 사상 최대 규모로 모여 미국 내 한인 정치력을 결집하고 한인사회 발전 비전을 수립하기 위한 뜻 깊은 행사가 오는 3월 미주 한인이민 사상 최초로 LA에서 개최된다. 세계한인정치인협의회, 미주동포후원재단이 주최하고 본보와 한미경제개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정치포럼은 미주 한인의 정치력 신장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경제력과 인구에 걸맞지 않게 여전히 정치적인 공백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한인사회가 이번 역사적 포럼을 통해 한인사회의 경제발전에 비례하는 조직적 정치력 신장 방안을 도출하기 위한 힘과 지혜를 모으는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난 1992년 LA폭동 때 우리 한인들이 피해를 입었던 것은 정치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차세대 정치인을 발굴하고 훈련시키지 않으면 똑같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반복되게 마련이다.
박흥률 부국장 겸 기획취재부장
peterpa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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