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은 참으로 조용하였다. 어른 여섯에 다 큰 아이들 일곱, 세 가족 열세명이 한 집에 모였는데도 고요한 밤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남자 어른들은 바둑판을 들고 와 딱딱 소리를 내며 바둑을 두고 훈수꾼도 있었다. 아이들은 카드놀이를 하느라 밤새 떠들썩했었다. 엄마들은 비디오테입을 빌려와 밀린 숙제하듯 드라마를 보았는데 일년 사이에 문화가 바뀐 것이다. 올해는 각자 따로 놀았다. 어른이건 아이건 개인 노트북에 넷북에 아이패드를 가지고 왔고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었다. 모두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으니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건드려야 반응을 보인다. 스키장의 샬레가 PC 방이 된 듯하였다.
컴퓨터를 안 가지고 온 엄마들조차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여서 도서관에 온 것처럼 정숙을 유지했다. 밥을 먹을 때만 잠깐 컴퓨터를 치우고 대화를 할 뿐, 각자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눈이 오는 동영상을 찍어 전송하느라 바빴다. 마치 일인 방송국의 기자들 같았다. 저마다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공유하고, 각자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사이버 라이프였다.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짬짬이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이메일과 트위터를 확인하는 ‘중독자’의 모습도 있다. 스마트폰과 트위터는 ‘소통’이 아닌 ‘중독’의 도구는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년에 한번 추수감사절에 모이는 맘모스 스키장에 14년째 오건만 풍속도는 바뀌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변하여 바야흐로 사이버 인간이 된 것이다. 세월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남편은 생면부지의 어떤 이와 인터넷으로 오천원을 걸고 바둑을 두다가 나중엔 오만원, 십만원으로 판돈이 늘어난 내기바둑을 두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이메일을 체크하고 밥을 지었다. 아이들은 컴퓨터와 대화를 하고 히죽댄다. 이젠 컴퓨터를 인간의 삶에서 뗄 수 없고 마치 기계와 인간이 합체된 신인류가 탄생된 듯하다.
밤사이 눈이 내리고 곰이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고 문밖에 내놓은 아이스박스 속의 음식을 다 해치웠다. 파란색 이글루를 나무 밑으로 끌고 가서 달걀 한판을 먹고, 만두를 두팩이나 해치우고, 국거리용 쇠고기도 한 덩이, 해물파전을 하려던 굴과 조개를 다 먹었다. 후식으로 주스와 두유까지 먹고 겉포장과 곰 발자국만 남겼다. 그나마 곰이 다녀간 사건으로 인해 공통의 화제가 있었다. 고맙다 곰아.
우리가 맘모스 스키장에 있던 그때, 한국에선 외삼촌이 정성스럽게 쓴 긴 카드를 부쳤다. 12월 첫 날에 카드를 받았으니 삼촌은 11월 하순 즈음에 부쳤으리라. 삼촌의 카드를 받은 후 답장을 보내도 늦지 않을 만치 이른 카드이다. 외삼촌은 어릴 적 나의 우상이었다. 대학생인 삼촌이 꼬마인 내 손을 잡고 연희동 논둑길을 걸으며 노래를 목청껏 부르면 속이 다 시원했다. 어려서 삼촌을 흉내 내며 “우나 푸르디바 라그리마--” 하고 노래를 따라하곤 했다. 나중에 커서 알았는데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테너의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내 생애의 첫 스케이트, 첫 손목시계를 선물했던 외삼촌은 미국에 사는 조카를 위해 25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첫 연하장을 보내는 것이다. 내리사랑이라더니 나는 종종 삼촌께 답장도 못한 채 한 해를 보낸 적도 있었다.
손 글씨로 남에게 감동을 전달해 본 것이 언제 일이던가? 편지를 부칠 때의 설렘, 상대에게 도달하기까지의 마음 졸임, 다시 답신을 받기까지의 기다림. 이 모든 걸 잊고 지낸 것이 꽤 오래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날로그 세대의 손 편지를 받고 마음이 일렁이니 나도 아날로그에 더 가까운 사람인 모양이다.
아!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모든 것이 느리고 모두가 부족하게 살았지만 인정이 넘치던 그 때가 눈물 나게 그립다. 73세의 외삼촌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뵐 수 있으려나. 그보다 손위 누이인 우리 엄마는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으려나. 사이버 시대를 살지만 어쩔 수 없는 물리적 거리 앞에 마음은 천근이다.
모든 이에게 성탄카드를 보낸다.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모두에게 건강을.
이 정 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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