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로 도심의 교통이 마비되었던 서울을 뒤로하고 필자는 2010년 1월 말 버클리 대학교(UC. Berkeley) 객원교수 자격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서부해안가 베이 에어리어(Bay Area)의 한 도시에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얘기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이곳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캘리포니아의 기후는 가히 환상적이다. 연중 내내 한국의 초가을 날씨를 유지하고 있으며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시원하고 깨끗한 바다 바람은 바다냄새라곤 전혀 없고, 색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로수에서 풍기는 향긋한 향내까지 머금은듯하다. 늘 습도가 낮아 불쾌지수가 없으니 고온다습한 한여름을 당연히 견디어내던 나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항상 산뜻하고 가뿐해 정말 축복받은 땅이란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태평양의 짙은 바다색을 감상할 수 있고 또 도시 주변을 감싸고 있는 짙푸른 산과 초원도 볼 수 있어 삶의 운치는 배가 된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서 주위의 산과 초원은 모두 황금색으로 누렇게 변해 버렸다. 한국에서 한여름의 울창한 초록에 익숙하던 내 눈은 황금색의 구릉과 산, 또 그 황금색과 대비를 이룬 나무와 잔디의 푸르름에 처음엔 당황하면서도 뭔가 색다른 이국적인 운치를 느낀다.
비록 주변의 산이 온통 황금색으로 변했지만, 필자의 집 근처에 있는 잔디는 푸르름을 잃지 않아 처음에는 별 의심 없이 평지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가느다란 빗소리에 문밖을 나가보니 스프링클러(sprinkler)가 땅 속에서 솟아나와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스프링클러는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에 한해서만 설치되어 있는 줄 알았다. 필자는 캘리포니아의 푸른 잔디에 대한 비밀을 신문기사를 읽고 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Los Angeles Times)에 따르면, 지난 7월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Orange County)에서 살고 있는 한 부부가 수도료를 아끼려고 자신의 집에 있는 정원의 잔디를 모두 뽑았다가 시 당국으로부터 도시법 위반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내용인 즉, 가뭄이 심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정원에 잔디를 키우려면 연간 수십만 갤런의 물이 사용되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수백 달러에 달하는 수도료가 만만치 않아 정원의 잔디를 모두 제거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들 부부는 2007년 약 30만 갤런 소비하던 물 사용량을 2009년에 약 6만 갤런으로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시당국은 이들 부부에게 정원에 다시 잔디를 심을 것을 명령하였다.
7월 초 아이들의 여름방학을 기회로 가족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고에 여행하면서도 항상 그곳의 잔디는 어떤지, 계속 살아있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잔디는 푸르렀고 스프링클러도 설치되어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이 넓고 많은 도시에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설치비용이 들었고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유지비용이 계속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에서 관리하는 잔디이건 개인이나 기업이 관리하는 잔디이건 캘리포니아에서 잔디를 위한 경제적 비용은 모르긴 몰라도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어갈 것이라 예상하면서, 정말 미국이 대단한 나라이구나! 절로 탄복했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의 경제규모는 미국의 다른 주에 비해 훨씬 클 뿐만 아니라 웬만한 선진국의 국가경제 규모에 버금가 세계에서도 7-8번째라고 한다. 이 말은 일개 캘리포니아 주의 경제규모가 러시아의 경제규모를 앞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2008년 뉴욕 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경제는 상당히 악화되어 작년 말 기준으로 전체 50개 주 가운데 46개의 지방정부가 재정 적자에 허덕이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미시간, 뉴욕 등 6개 지방정부는 파산위기에 직면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한다. 경제사정이 제일 좋지 않은 캘리포니아의 올해 적자규모는 190억불 즉 우리 돈으로 20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잔디유지를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화 방지를 위해서건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하는 미국 시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건 어쨌든 이를 감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캘리포니아의 푸른 잔디를 보면서 필자는 문득 서울의 청계천이 떠올라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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