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궁화’ 작곡가 마크 그레이·연주자 제니퍼 고·지휘자 그랜트 거숀
“무궁화는 어떤 꽃보다도 은근하고 겸손하다. 한국을 ‘은자의 나라’라고 한다면, 무궁화는 요염한 색채나 향기도 없는 ‘은일의 꽃’이며 점잖고 겸허한 군자의 풍모를 갖추었다. 무궁화가 지닌 수수함과 끈질긴 생명력은 우리나라의 민족성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국화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이양하의 수필 ‘무궁화’(1948년) 중에서>
민족의 꽃에서 이산가족의 노래가 된 ‘무궁화’(Mugunghwa: Rose of Sharon)가 내년 3월6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울려 퍼진다. 유명 작곡가 마크 그레이가 작곡하고, 미 서부지역 최고의 합창단인 LA 매스터 코랄(지휘 그랜트 거숀)이 노래하며, 세계 정상급 바이얼리니스트 제니퍼 고와 체임버 앙상블의 연주로 세계 초연되는 이 작품은 분단 한국의 상처와 이산가족의 한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대작이다. 한국에서 제18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한창이던 지난 2일 디즈니홀 내 LA 매스터코랄 연습실에서 제니퍼 고와 마크 그레이, 그랜트 거숀을 만나 ‘무궁화’에 대한 심도 깊은 인터뷰를 가졌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최정상에 있는 세 사람은 이 곡과 한국, 한국인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사랑과 열정, 기대를 갖고 있었다.
실향민 가족의 아픔 통해 분단의 상처 조명
전 인류적 화합을 상징… 내년 3월6일 초연
‘무궁화’의 탄생은 2년전 시작됐다. 평소 친하게 지내온 마크 그레이와 제니퍼 고가 볼티모어에서 우연히 만나 “우리 함께 일 좀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후에 전화로 프로젝트를 상의하던 두사람은 이민자의 삶과 문화 충돌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니퍼의 가족 이야기로 옮겨갔다.
“저의 어머니는 북한에 가족이 남아있는 실향민입니다. 몇 년 전 어머니께서 병원에 한동안 입원한 적이 있는데, 영어를 못하는 어머니를 곁에서 보살피면서 나 자신이 한국 문화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하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죠. 정서적으로 한창 성장하던 시기에 내 주변에는 한국 문학이나 음악이 없어서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의 문학과 시를 번역해서 읽고 한국문화에 관해 더 알려고 노력하며 정체성에 눈 뜨던 시기에 마크를 만난 것이었다.
“제니퍼의 이야기를 듣고 대부분의 한인들이 비슷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또 다른 한인 친구에게서도 자기 아버지가 평생 북한에 있는 가족을 찾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한 가족의 작은 샘플을 가지고 전체 한국의 큰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회적, 정치적, 개인적인 스토리가 이처럼 한데 집약돼있는 좋은 음악소재를 찾기도 힘들 것입니다. 더구나 LA는 해외에서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니까 제니퍼와 LA 매스터 코랄과 함께 하면 너무나 완벽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추진했지요”
마크 그레이가 샘플로 삼은 스토리는 재미한인 엔지니어 김남수(가명)씨 이야기다. 평양에서 태어나 월남한 김씨는 2003년 작고했는데, 사후에 딸과 어머니가 벽장 안에 있는 박스를 열어보았을 때 거기에는 아버지가 평생 기록해온 한 맺힌 이야기들과 수천편의 아름다운 시들이 보물처럼 가득 담겨 있었다고 한다. 평양의 감옥에 갇혔던 시절로부터 전쟁 때 탈출한 스토리와 일평생 북에 남아있는 가족을 찾으려 애쓰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엄청난 비극과 놀라운 가족사랑에 감동한 마크는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고 한국의 음악과 문화를 공부하며 곡을 써내려갔다.
“제니퍼와 프로젝트를 긴밀하게 상의하며 그녀의 바이올린 음색을 살린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바이올린이 오르내리는 선율로 산과 골짜기가 어우러진 한국의 시골 풍경을 그리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 분노와 절망, 광기와 염원 등 인간 감정의 모든 기복을 표현했지요”
40분짜리 대작 ‘무궁화’의 합창 가사에는 고 김남수씨의 시와 그가 북한의 누나와 주고받았던 편지 내용이 사용됐다. 62명으로 편성된 합창단은 누나의 이야기를 한국어로, 김씨의 절규는 영어로 노래한다. 연주앙상블은 10명(플루트, 오보, 클라리넷, 바순, 혼, 피아노, 첼로 4명)으로 구성되는데 특별히 첼로를 많이 편성한 이유에 대해 마크는 “첼로가 3대 이상 들어가면 오케스트라 사운드 효과를 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연 전체를 지휘하는 그랜트 거숀 LAMC 음악감독은 “사람의 목소리는 굉장히 파워풀하다”며 “특히 모든 언어는 사람의 목소리와 연결돼있기 때문에 한국어와 영어로 노래하는 것이 대단히 강렬하게 가사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궁화’의 시간적 배경은 이산가족들이 아직도 살아있고 분단 비극이 진행형인 현재가 아니다. 전쟁 당시도, 일제시대도, 조선시대도 아닌 아주 오래전, 전쟁도 분단도 없는 아주 먼 옛날 유토피아의 세계다. 기독교나 불교가 전래되기도 전, 민속신앙만이 존재하던 기원전 자연 상태의 한반도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이들을 연결하는 무당이 한판 굿을 벌인다. 김씨 가족과 모든 한국인의 한을 치유하고 위로하며 축하하는 의식이다.
샤만의 역할을 바이올린으로 표현하게될 제니퍼 고는 “이 음악은 브릿지이고 커넥션”이라고 말한다. “남과 북을 잇는 다리, 사람들을 잇는 다리, 작은 것과 큰 것을 이어주며 청중과 연주자들을 이어주는 인류애의 커넥션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그녀에게 이 공연은 매우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의식이다.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한국의 소리입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전쟁을 겪은 우리 부모세대가 지금 늙어가고 있고, 이산가족과 재회도 못한채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이 비극을 우리 세대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리고 싶습니다”
‘무궁화’를 곡명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 “통일된 한국의 모습을 그려봤을 때 화합과 영원함의 상징인 무궁화 꽃이 떠올랐다”고 설명한 마크 그레이는 “이 작품이 한인 뿐 아니라 모든 커뮤니티를 터치하는 음악, 끊어진 모든 것을 다시 연결하는 음악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랜트 거숀 지휘자는 “한인 커뮤니티는 합창단이 굉장히 많고 교회마다 성가대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으니 이번 합창 공연에 특별한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무궁화’ 뿐 아니라, 우효원의 ‘메나리’와 다른 한국 민요들도 연주하게 될 내년 3월6일에 한인들이 많이 디즈니홀을 찾아 감상해줄 것을 당부했다.
<글 정숙희 기자·사진 왕휘진 기자>
작곡가 마크 그레이에게 ‘무궁화’는 사회적, 정치적, 개인적 스토리를 모두 담아낸 완벽한 음악이다.
지휘자 그랜트 거숀에게 ‘무궁화’는 합창을 좋아하는 한인 커뮤니티뿐 아니라 상실의 아픔을 가진 LA의 모든 커뮤니티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공연이다.
바이얼리니스트 제니퍼 고에게 ‘무궁화’는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어머니 세대와 우리 세대를 잇는 소중한 커넥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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