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wood) 라는 말이나 여자 (woman) 라는 말을 영어로 바르게 발음하는 한국인은 드물다. 한국어 발음에는 없는 발음이다. 1960년대 브라질 농업 이민이 한창일 때, 한 중학생이 영어 수업 시간에 이민가는 생각만 하고있다가, 선생님으로부터 갑자기 우먼 (‘워먼’이라고 쓰는 게 가깝지 않을까?)의 복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응겁결에 일어나 생각하고 있던 “이민(women)”이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맞았어”한다. 그만큼 여자에 대해 발음하기부터 어렵다.
옛날 옛적 국방부 본부에서 근무할 때였다. 용산역에서 경부선과 호남선 군용 열차가 떠났었다. 그 역 앞 광장에는 휴가 오가는 병사들로 북적거렸고, 시골 출신 사병들의 군기를 잡겠다고 잘 차려입은 수도 경비 사령부 소속 헌병들이 이리저리 폼잡고 다녔다. 그 역 앞에는 몇개의 지하 다방들이 있었고, 그 중 한 다방의 마담은 지금 생각해도 우아한 모습의 귀부인처럼 보였었다. 그래서 그 용산역을 이용하는 서울 근무 사병들에게는 인기 만점이었다. 나중에 안 이야기였지만, 그 마담은 의사인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자녀 둘을 데리고 먹고살자니 뾰족한 재주가 없어 다방 마담의 길로 접어들었다. 매일 한복을 차려입고 담배 연기 자욱한 지하 다방에서 마담을 하고 있으니 뭇 남정네들이 그냥 쉬 내버려둘까? 또 알게된 이야기로는 용산역에 근무하는 한 간부 직원의 바람 상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의사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일은 나에게 대단히 충격적이었지만 미래에 대해 “나의 마누라는 꼭 학업을 계속시켜야겠다”는 단단히 각오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죽어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기에, 그 외롭고도 우아했던 마담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감사의 마음이 솟는다.
10년 전 산호세 컨벤션 센터에서는 GE사에 근무하는 동양계 직원들의 미국내 지역별 전국 대의원회가 열렸었다. 회사가 소수 민족에게도 출세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의 대회였었다. 이 대의원회에서 많은 여성, 특히 젊은 중국이나 대만 여성들이 어떻게 하면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하고, 저돌적으로 참석한 회장단에 멘토링을 (mentoring) 의뢰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유리 천정을 뚫고 올라가고자 하는 동양 여자들의 대담한 갈망이 표출된 것이었다. “여자가 집에서 애나 키우고, 밥이나 짓고 있지”하는 생각은 석기시대의 유물이 된 것이다.
경험에 의하면, 여자들은 한번 땅을 파기로 작정하면 끝장을 보는 것같다. 출세 가도를 달리기로 작정하면 남편까지 과감히 희생시키는 것 같다는 말이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마가렛 대처 여사는 그래도 귀가하면 앞치마 두르고 남편 밥상이라도 차려주는데, 특히 동양 여성들은 문화적인 억압에서 풀려나서 그런지 더욱더 일에 몰두한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자기 자식만은 끔찍히 아낀다. 국립 대만 대학을 나온 이웃의 한 대만 여자의 말에 의하면, “남편은 (夫)라고 쓰는데, 이는 하늘 천(天) 위에 있는 점으로 하늘보다 높다”는 뜻이란다. 하늘 위에 있는 점이라? 아주 흥분시키는 말이었지만 곧 꿈깨서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허구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한 후, 아내를 학교로 보냈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고 식당개 삼년에 라면을 끓인다고, 그 때부터 시작한 혼자 밥짓는 일은 노신사로 변한 지금엔 주방장 보조 정도는 되었다. 그 당시 아내는 주말이면 기차타고 집으로 왔다. 한번은 기차가 연착했다. 30분이 지날 때에는 화가 났다. 셀폰이 없을 때라 쉽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한시간이 지나니 걱정이 되었다. 역에는 역무원이 한사람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자기 근무 시간은 끝났으니 묻지말라고 한다. 이것이 미국 생활이다. 역에서 걱정하면서도 아내를 학교로 보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자녀들도 늦게 태어나, 자식 농사 빨리 지은 사람들은 자녀들의 나이가 비슷하니 자기 또래인 줄 알고 반말을 해댄다.
닷 컴 시절에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것으로 밥이나 짓고, 자녀들을 키우며, 낮엔 끼리끼리 모여 노닥거리던 많은 아내들이 불황으로 직장 잃은 남편 탓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아내도 학교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유비무환이라고 해야하나? 얼마 전 한미 여성 전문인 협회에서 누가 여성들의 커리어에 관해 강연을 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나처럼 마누라 뒷바라지한다고 세월 다 보낸 놈이 또 하나 있구만!”하고 기사를 봤더니 강사가 다름아닌 40년 지기지우 (知己之友)인 내 마누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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