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전 다양한 민족 문화
동등한 권리 누리며 존속돼
배는 10월 14일 아침 7시 반에 열 흘 전에 왔던 팔레르모 내항에 도착했고 우리는 한시간 먼저 가는 이곳에서 벌써 8시에 배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왔다. 부두에서 가까운 리베르타 (Liberta) 대로상에 있는 버스표 파는 곳을 찾아 왔다. 근방에는 폴리티마 (Politeama)이라는 극장이 있고 여기서는 발레와 음악회가 자주 열리며 마시모 (Massimo)오페라 극장과 쌍벽이 된다고 했다.
둥글게 지어놓은 이 극장의 양면의 외벽은 희랍식 기둥들로 장식하고 지붕은 달리는 여러 마리의 말 조각상을 붙여 놓았으며 아침 햇살까지 받으니 아주 멋이 있었다. 서남쪽의 산위에 있는 몬리알리 (Monreale)읍으로 가는 왕복표를 사고 시내버스를 타고 로얄 궁 근방에서 내려 몬리알리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쉬는데도 많고 5마일 남짓한 산길을 한 시간도 넘게 왔다. 정상의 평평한 큰 광장에 있는 몬리알리 두오모는 잘 알려진 12 세기의 성당이며 시칠리에서 노르만 (Norman)들의 으뜸가는 건축 작품이라고 한다.
노르만 왕이 이 지방의 대주교보다 힘이 셈을 보여 주기위해 팔레르모 성당보다 호화롭게 짓고 이태리, 시실리와 비잔틴의 장인들을 모아 동서가 절충된 건축양식으로 지었다고 했다. 비교적 단순한 외모와는 달리 내부는 아주 호화롭게 꾸며 졌는데 그 넓은 벽면과 천정도 다 금색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아랍형 아치의 기둥도 조각이나 모자이크를 해 놓았다. 회중석은 가톨릭 성당식이고 교단 뒷벽의 큰 예수님상은 희랍정교회식이었다. 사방 벽에는 아름다운 성화도, 노르만왕 윌리엄 II세가 1170년경에 이 교회를 성모 마리아에게 봉정하는 모습의 모자이크화도 있었다. 이 호화로운 성당의 구석에서 종교를 앞세우며 위정자나 성직자가 집착하는 권위화도 보는 것 같다. 입구의 희귀한 철문에는 성경을 인용한 장면들이 많이 새겨져 있어 플로렌스의 두오모를 연상케 했다.
이곳에서는 저 멀리 바다와 팔레르모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고 주변의 기념품상에는 다리 3개가 달린 시칠리를 지키는 여인상의 작품이 많이 있었다. 이는 세다리의 탁자와 같이 제일 간단한 완성을 의미한단다. 한국의 부채나 내가 자라던 동네의 사당 대문에도 인내천의 삼태극을 그려놓은 것을 보면 다 같은 조화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팔레르모로 다시 내려와 로얄 궁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지하 기차역에 왔다. 다들 친절하게 쉽게 가는 길을 가르쳐 주어 비행장에서 오는 지하철은 아니고 기차 같은 것을 타고 중앙역까
지 세 정거장을 차표 없이 올수 있었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체팔루 (Cefalu)라는 시실리 북쪽해변에 있는 중세도시를 가볼 참이었다. 12시가 가까웠고 이곳에서 12시 5분에 출발하면 4시 반에는 돌아올 수 있고 배는 6시에 떠나니 시간은 충분했다. 왕복 1인당 19유로로 표를 사고 제법 깨끗한 기차의 중간 지정좌석에 앉았다.
이 기차는 여기서 세 시간 걸리는 메시나 (Messina)까지 가 페리로 해협을 건너고 본토로 가는 장거리 기차인데도 출발시간이 약 10분이나 늦었다. 좌석이 거의 다 찬 기차는 우중충한 도시의 건물과 잡목의 공터를 지나 약 15분후에는 해변으로 나왔고 여기서 부터는 마치 불란서의 리비아라를 달리는 듯 하고 중세의 고풍이 담겨있는 동네와 집들을 지나는지라 이 특별한 전경이 뇌리에 오래 남을 듯 하다. 높은 산을 오른쪽으로 하고 왼쪽으로는 검푸른 바다를 보며 요트는 없었으나 낚시배도 떠 있었고 어선인가 용선인가가 다니는 풍경도 있어 바다가 생활의 터전임을 알 수 있었다. 험한 바위산과 해변사이에 좁게 잡은 체팔루는 2층의 집들과 붉은 지붕으로 꽉 차 있었고 길은 골목길같이 좁았으나 팔레르모 같이 혼잡하지도 않고 지저분하지도 않았다. 날씨도 선들 해 다니기가 상쾌했다.
루게로 (Ruggero)라는 중앙로를 쭉 따라 내려오니 우리가 보려는 쌍둥이 탑의 체팔루 두오모 (성당)가 나왔다. 오랜 세월을 버티며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이런 훌륭한 성당을 왜 이 좁은 읍에다 지었을까? 노르만 왕 로저 II세가 태풍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착륙한 곳이라며 감사의 표시로 지었다는 답이 나왔고, God의 역사하심이 이 노르만 왕에게 임했다고 생각했던 가 보다.영국 남부지방의 노르만들이 11세기말 이 시칠리를 점령한 후 비잔틴국 희랍인들과 사라센 아랍들의 견고하고 미적인 건축 솜씨에 자기들의 아치와 기둥세우는 법을 접목해 15세기까지 400년에 걸려 중수했다는 성당이다. 동지중해의 이스탄불이나 알렉산드리아 외는 별로 찾아볼수 없는 건물형태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다문화적 (Multiculturalism)이란 말이 불과 20여년전부터 회자되고 있으나 이 지방에서는 800년전에 실제로 시행되고 있었고 기독교인 노르만 왕, 회교
도의 사라센족, 아랍어의 무어족, 희랍어를 쓰든 비잔틴사람들, 히브리어의 유태인등 다 동등한 권리와 사회에 대한 보탬으로 이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결정체가 이 체팔루읍과 그 성당이다.
이 지방의 이권을 두고 나폴리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갈등 등 역사적인 일화도 많았다. 뒤의 높고 우람한 황갈색의 바위산에는 로만과 희랍인들이 BCE 5세기 전에 세운 신전의 유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중세때 지은 온천수를 사용한 빨래터의 집과 왕 로저가 성당을 지을 때 자주 둘렀다는 초대소가 있다기에 찾아 갔으나 1시부터 4시까지 파시한다며 문이 잠겨져 있었다.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동네를 지키며 돌아다니고 주민은 다 자고 있으니 이 동네 수호성자의 짐
도 한결 가볍겠네. 3시의 팔레르모가는 기차에는 여행객이 반을 넘고 빈 좌석은 한두군데 밖에 없었다. 메시나에서 온다는 부부와 마주 앉았으나 말은 통하지 않고 한시간동안 눈이 마주치면 서로 미소만 했다.
팔레르모의 기차역에서 로마가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오면 700년동안 서있는 부치리아 (Vucciria)라는 시장이 있는 것을 알고 우리는 한번 더 이 시장통을 돌아보기로 했다. 부치리아라는 시칠리 말은 복잡하고 어질러져 있는 것을 뜻 한다는데 그 말이 맞는 것같이 부산하다. 생선가게나 야채상 자판의 반은 팔렸고 치스와 너트상의 계산대에도 줄이 있었고 과일과 빵가게는 반값 떨이를 하는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다 팔릴 것도 같다. 발톱까지 보이는 돼지다리 네 개를 푸줏간에서 보며 아무래도 시간이 없어 오늘 팔리기는 어렵겠다고 여겼다.
이곳은 항상 싱싱한 과일과 채소 또 생선을 팔아서인지 오전 5시에 벌써 문을 여는 곳이 많다고 했다. 이 시장 장면을 잘 묘사한 이곳 출신 구투소 (Guttuso)의 1974년 작품으로 일약 이태리의 유명화가 된 일화도 있단다. 앞으로 적어도 700백년은 계속 유지된다고 시칠리안들은 믿는단다. 배로 돌아와 아까 시장통서부터 출출하던 참이라 생선, 족발만 빼고 시장에서 본 것 다
넣고 샐러드 한 접시 만들어 먹었다. 오늘 저녁 쇼는 라스베가스 식이라며 음악과 춤을 공연했으나 캉캉춤만 보고 방으로 돌아와 내일의 일정을 짜본다.
시칠리의 몬리알리에 있는 두오모 성당
시칠리 부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체팔루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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