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을 마친 군인들이 돌아왔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매일 사망자의 소식이 들린다. 전쟁은 저 멀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 느껴지고 전쟁의 실상과 상처는 미디어에 의해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트랭 래(Trang T. Le)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 LA 근교의 화실에서 작업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이다. 2009년 버거몬 스테이션의 루스바코프너 화랑에서 ‘107321’이라는 제목으로 6장의 대형 유화작업을 전시했다. 짙푸른 청색을 배경으로 10만7,321개의 작은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이라크 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많은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마치 밤하늘의 별 밭을 이루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녀의 화실을 방문하여 작업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그녀의 그림은 깊고 어둡고 무한한 짙은 청 빛과 깊은 자주 빛의 추상화들이다.
9.11 사건 때 그녀는 세 살 때에 공산화된 베트남에서 느꼈던 공포를 다시 느꼈다. 사람들이 뛰어다니던 기억이 있고 아버지는 투옥되었었고 엄마와 아버지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 자주 동생들과 함께 불안과 공포 속에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11세 때 전 가족이 보트피플이 되어 베트남을 떠났는데 공산화된 베트남에 사느니 바다에서 죽고 싶다던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바다에서의 극심한 고생 속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전쟁의 기억은 그녀의 뇌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얘기하며 자주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이라크 전쟁이 저 멀리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안도감을 느끼는,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 자신이 스스로 놀라워서 그녀는 이라크 전의 실상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라크인 사망자 조회라는 웹사이트를 통해 이라크인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주시했고, CNN을 통해 죽어가는 미국, 영국인 군인들의 사진과 사망경위를 찾았다.
작은 노트북에 이라크 전이 시작된 2003년 3월20일부터 죽어간 군인들의 사진을 잘라 붙이고 이름을 적어가기 시작했다<사진>. 꽃처럼 앳된 죽은 병사들의 사진을 보며 울곤 했다. 2009년 11월까지의 사망자 수가 10만2,744명이었고 현재까지는 11만1,895 (이라크인 10만7,153 미국·영국군인 4,742)명으로 추정되는 데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가슴 깊이 묻혀진 어린 시절의 상처와 함께 고립되어 있던 그녀의 세계는 죽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세계를 향해 열리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라면, 그 죽음의 비극과 존엄함과 함께라면 자신의 내면의 과거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고 작업과 함께 치유되고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3년을 매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진혼하던 그녀의 일상은 고통과 병고, 슬픔으로 가득 차 일어설 수조차 없는 어두움으로 함몰해 가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의사인 남편의 사랑과 관심으로,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진통의 작업이었다.
공산치하의 공포와 상해의 염려로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던 부모님의 고통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고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전쟁의 모든 기억들이 들추어내지며 치유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이 죽은 병사들을 진혼할 때에 죽은 병사들이 그녀의 영혼을 치유해 주었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처참하고 불확실한 시간의 기억은 삶의 고난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예술성의 깊이로 캔버스 위에서 승화되었다.
전사자들의 죽음의 심연을 지나온 그녀는 이제 아무런 이미지도 없는 미니멀적인 단색의 추상화를 그리고 있다. 추상화는 해방과 자유의 무한함을 그릴 수 있게 한다고 했다. 동그라미를 그리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다며 하나하나의 고귀한 삶이 당한 비극적 죽음을 동그라미로 그리며 모든 죽음을 넘어선 해원의 시대가 자신에게 찾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가는 몸매에 새처럼 가벼이 움직이는 그녀의 몸짓과 반짝이는 눈빛, 떨리는 목소리는 한 시대가 겪고 있는 고통을 온통 다 받아 삭여내며 측은지심으로 잠 못 이루며 함께 앓다가 깨어난 ‘사람’의 모습이었다.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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