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중심도시는 바르셀로나다. 근 400만명이 이 도시와 근교에 산다고 하니 유럽에서는 몇째 가는 큰 인구밀집 지역이고 금융, 무역, 예술 등 여러 면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다른 서부 지중해 도시들처럼 이 도시도 중동의 페니키아인들이 처음 건설하고 그 후는 희랍족이 차지하고 다음엔 북 아프리카의 회교도들인 카르타고인들의 통일 국가에 흡수 되며 카르타고왕국이 패한 후로는 로마제국에 속하게 되는 순서를 거친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국을 치고 점령하기 위해 코끼리떼를 몰고 바로 북쪽의 피레네 산을 넘고 알프스 산도 넘은 소위 2차 포에니 (Punic)전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 뒤 게르만계의 프랑크족 (Franks)의 이동과 아랍족의 침략 등이 이어졌으나 자체의 아라곤 (Aragon) 제국을 13세기에 건설하고 이태리 일부와 멀리로는 희랍 섬들까지 점령하며 3,4세기동안 대국을 유지 했다. 마드리드에 있던 스페인왕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한 후 세력이 커지자 무력으로 이 아라곤 왕국을 침략하여 폐허로 만들었고 후에 나폴레옹도 이 지방을 침략해 또 황폐하게 만들었다.
금세기에는 프랑코 (Franco)의 쿠데타 정권과의 상쟁으로 많은 살생이 있었고 자기들 상용어도 거의 잃을 뻔 했다니 영화로움보다 고난이 더 많았던 과거사를 갖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축구경기는 사생결단식이고 스페인에서도 투우경기를 자제하는 지방이기도 하다. 그들의 반골기질은 예술분야에도 나타나 유럽 전체를 풍미하던 고전적인 고딕이나 르네상스의 사실적이고 과한 장식에서 부터 벗어나 예술가의 뜻을 그대로 추려 표현시킨 소위 전위예술의 모더니즘을 처음으로 실천해 본 곳도 이 바르셀로나였다.
가우디 (Gaudi)의 건축물이나 초기의 피카소 (Piccaso)의 미술품들이 다 이곳의 생산품이다. 마드리드와 날씨도 매우 달라 여름은 별로 덥지 않고 건조하며, 겨울은 별로 춥지 않고 다습하다니 두 철 다 살기에 좋겠다.
오늘은 10월 10일 토요일이고 청명하며 기온은 80F로 올라간단다. 배는 아침 8시전에 도착했고 밤 11시에 출발 한다니 시간의 여유는 충분하다. 부두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역사가 있고 항시 축제 분위기인 번화한 램블라 (Rambla)가에 와, 길 끝에 있는 콜럼버스 (Columbus) 모뉴먼트 앞의 광장에 내렸다. 엄청나게 높은 원추와 그 위에 올려놓은 동상은 런던의 넬슨 칼럼보다 훨
씬 높은 것 같다. 콜럼버스만큼 양 대륙의 여러나라에서 추모를 받는 사람은 역사상 없을 것 같다. 미국은 물론이고 모든 남 북 아메리카 국가들, 그가 태어난 이태리, 신대륙 발견에 뒷받침을 하고 신대륙을 손에 넣은 스페인, 별 도움은 안주고 나중에 브라질을 차지한 포르투갈 다 그를 기념한다. 아라곤 제국의 여왕 이사벨라 (Isabella)에게 제일차 신대륙 항해의 결과와 그 발견을 보고한 곳이 바로 이 바르셀로나였다.
양쪽에 양겹의 가로수로 짙은 녹음이 져 있는 램블라가를 올라오다 옆의 구시가로 들어서 로마제국시대로 부터 중세에 이르는 고딕체의 건물들을 본다. 13-15세기에 지은 바르셀로나 주교의 성당으로 고딕체로 성당본체 보다 건물위로 올라온 첨탑들이 더 인상적이었고 본당안의 모습은 불란서의 성당들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기둥들이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근방에 있는 중세의 왕궁같이 생긴 피카소 박물관 옆의 좁은 길을 걸으며 외관만 봤다. 7,000여점의 작품중 3,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니 이곳이 아마 스페인 중앙은행의 지하금고 보다 더 부자일려나? 다음 방문지를 세그라다 (Segrada)가족교회로 정하고 길을 조금 돌더라도 시가형의 높은 현대식 건물로 시의 동남부를 압도하는 아그바 (Agbar)타워쪽을 둘러 가기로 했다. 우선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근처에 있는 개선문으로 갔다.
파리의 것을 보고 19세기에 지었다고 하나 전쟁에서 별로 이긴 적이 없어 당시 왕실의 권위를 부각하는데 의미를 두었다고 한다. 차라리 독립문으로 지었다면 프랑코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했을까? 양쪽 차도 사이의 녹지에 아취형의 뻐꿈 뚫린 대형문이었으나 별로 하는 일은 없었다. 차들이라도 빙빙 돌아가게 로타리안에 두었으면 했다. 개선문 동쪽에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고 그 안에는 미국의 전위 조각가들이 가우디를 기린다며 땅위에 만들어 놓은 모자이크된 파도의 물결상도 있었다. 카타로니아 음악 박물관과 국립극장이라는 곳을 외모만 보고 지나며 아그바 타워를 뒤로 하고 큰 대로 (Diagonal)로 올라왔다. 투우 (Toros)라는 원형 노천극장이 있었고 음악회, 스포츠, 간혹의 투우경기도 하는 곳이란다. 세그라다 가족교회는 이곳의 북쪽 가까운데 있었다.
1882년에 짓기 시작하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2026년에 끝낼 예정인 대 규모의 세그라다 가족교회는 모더니즘 건축가 가우디와 그의 후계자들이 150년에 걸쳐 만들어 낼 바르셀로나의 명작품이다. 전통적인 교회건축 형태로부터 엄청난 변화의 시도이기는 하나 외모가 우굴쭈굴 사뭇 조잡해 보이고 색깔의 선택도 안 맞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철근이나 플라스틱 등 다양한 건축자재 등을 쓰고 있고 돌계단도 규격 없는 곡선으로 모든 구조물에는 꺾인 각과 직선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종려나무 같이 만든 기둥들, 거북상을 한 그 받침, 벌집모양의 천정등 그야말로 이단적 형상의 교회였다. 그러나 이 교회의 모든 부분은 기독교의 상징들로 채워지게 되며 따라서 이 교회를 통해 기독교인의 완전한 안식처를 마련하려는 시도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가령 세우고 있는 18개의 규모가 다른 지붕위의 첨탑들은 제일 높은 것이 예수님을 그 다음 높이의 12개는 12 제자, 그 다음4개는 4명의 전도자, 제일 작은 것은 버진 메리를 지칭 하고 가령 예수님의 것에는 십자가, 누가의 것은 소, 마가의 것은 사자 등등 그 상징물이 다 다르다고 했다. 교회에서 나와 다이아고날가에 오니 북쪽의 구엘 (Guell)공원으로 가는 버스도 있고 서쪽의 구
엘 파빌리온 가는 버스도 자주 있었다. 전자는 구엘이라는 바르셀로나의 부자가 제공한 땅에 공원을 조성하고, 가우디가 건물의 조형미와 건축기술상의 난제들에 대한 해법을 자연현상에서 찾아 다양한 색깔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곳이다.
후자의 파빌리온은 구엘의 전원과 별장을 황금의 열매밭에 비유하고 가우디 자신의 조형미술 작품을 발전시킨 곳이라고 하며 희랍신화를 인용해 이 밭을 지킨다며 네 종류의 동물형상을 입구에 달아 놓고 있는 곳이다. <계속>
건축가 가우디와 후계자들이 150년에 걸쳐 짓고 있는 세그라다 가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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