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8월31일로 캘리포니아 주의회 금년 정기회기가 끝났다. LA타임스 표현에 의하면 ‘어글리 엔딩’이었다. 극도의 양극화 분위기 속에서 고함이 오가는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밤중 자정 너머까지 불 밝힌 채 파파라치 단속법안은 통과시키고 비닐봉지 사용금지안은 부결시키며 무더기 처리를 강행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임무는 완수하지 못했다.
예산안 통과에 실패한 것이다.
새 회계연도는 7월1일부터 시작되었으나 캘리포니아 주정부엔 9월로 들어선 지금까지 예산안이 없다. 파행 운영이 오늘로 64일째다. 아무도 놀라지 조차 않는다. 관심도 없어 보인다. 하긴 지난 35년 동안 6월15일 예산통과 마감기일을 제대로 지킨 것이 5번에 불과하다. 캘리포니아의 예산안 표류는 이젠 연례행사로 굳어지고 있다.
31일에 예산안 표결을 안한 것은 아니다. 민주당 안과 공화당이 지지하는 주지사 안이 상하 양원에서 각각 투표에 회부되었고 둘 다 “예상대로” 부결되었다. 3시간 넘게 논쟁도 벌였으나 처음부터 상징적 표결로 치부해 양당의 합의 노력은커녕 팽팽한 대결만 한껏 과시했으니 “가부끼 연극” 한마당이라는 슈워제네거 주지사의 야유가 그리 지나친 것도 아니다.
새 예산안에서 해소해야 할 적자는 191억 달러다. 공화당은 124억달러의 지출 삭감을 원한다. 민주당도 교도소 의료비용과 공무원 봉급 등의 삭감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민주당이 제안한 지출 삭감은 83억달러다. 논쟁의 핵심은 양당안의 차액인 40억달러를 어떻게 메우느냐다.
민주당은 주 소득세와 차량등록세를 인상하고 유류세를 신설하며 법인세 감면을 연기하여 충당하려고 한다. 소득세와 차량등록세는 연방 세금보고에서 공제받을 수 있으니 실제적으론 세금감면이 된다고 강조한다.(그러나 중산층의 세금도 올라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공화당은 사회복지 대폭삭감이다. 웰페어를 받으면서 자립훈련을 받는 캘웍스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저소득층 데이케어 보조도 없애고 간병인 지원대상도 대폭 축소하고 정신건강 기금도 60%나 깎으려 한다.
매년 구체적 사항은 달라져도 양당의 주장은 언제나 같다 : 공화당은 복지 삭감, 민주당은 세금인상이다. 민주당은 공화당의 무자비한 칼날을 비난하며 “가장 힘없는 그룹을 외면하며 이 사회의 영혼을 죽이고 있다”고 비난하고, 세금인상을 결사반대하는 공화당은 “납세자가 현금인출기냐?”고 민주당을 몰아세운다.
이 같은 예년의 반복에 더해 금년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이다.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주 재정난의 근본원인으로 지적되는 공무원 연금 삭감과 세금 개혁을 예산안 서명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는데다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인 선거의 계절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주 예산안이 가장 오래 지연된 것은 2008년이었다. 85일을 끌다가 9월23일에야 발효되었다. 금년엔 이 최장기록을 깰지도 모른다. 자칫 중간선거 이후로 늦춰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다음 주 아시아 순방에 나서는 슈워제네거는 예산안 다룰 특별회기 소집도 안하겠다는 입장이고 민주·공화 양당 지도부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모두 늦어도 손해 볼 것 없다는 태도다.
이미 인기도 바닥이고 임기도 끝나가는 슈워제네거는 잃을 게 없다. 예산안 서명의 조건으로 연금개혁을 실현시킨다면 오히려 인기를 만회할 수도 있다. 사실 막강노조와 대결하여 연금제 개혁을 실현시키는 데는 새 주지사 보다는 레임덕 주지사가 나을 수도 있다.
재선에 나선 양당의원들도 각 선거구에서 ‘증세반대’와 ‘삭감반대’를 견지해온 자신의 소신을 캠페인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
예산안 표류의 후유증은 그러나 시간을 끌수록 심화될 것이다. 9월 하순이 넘어가면 IOU(후불수표) 발행이 불가피해 질 것이고 이미 공무원들은 월 3일의 의무적 무급휴가로 14%의 봉급삭감을 당하고 있으며 각급학교와 카운티 대한 30억달러 지불도 연기되었다. 차량국과 법원의 잦은 휴무로 주민들의 일상이 불편해지고 보조금 지불유예로 수혜자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주의회의 무책임한 직무유기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9%에 불과한 지지도가 어디로 더 떨어질지 걱정스럽다. 그러나 예산표결 절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고충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세금인상도 싫고 약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삭감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증세와 삭감은 인기를 얻기 힘든 정책이지만 적자를 해소하자면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배합하여 과감하게 시행하는 수밖에는 없다. 리더십과 재량권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캘리포니아 주 지도부에는 경륜 깊은 리더도, 다수당의 재량권도 부족하다. 누구 한 사람 탓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결함이라는 뜻이다.
11월 선거에 회부된 프로포지션 25가 부분적 해답이 될 수 있다. 예산안 통과에 필요한 찬성표수를 현행 정족수 3분의 2에서 단순 과반수로 바꾸자는 것이다. 그래도 예산안을 제때 통과 못시키면 의원들의 봉급 지불을 중단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어 통과될 확률이 높다. 물론 1당 독주의 위험도 있다. 그러나 책임소재가 분명하니 싫으면 다음 선거에서 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이 발의안만 통과된다면 적어도 내년부턴 예산안 표류는 없을 것이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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