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남가주 허모사 비치, 10여명의 사람들이 해변 청소에 나섰다. 피서객들의 눈길을 끈 것은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가 아니었다. 대부분 건장한 남성들인 그들의 허리춤에 찬 권총과 등에 멘 라이플, 평화로운 바닷가와는 어울리기 힘든 섬뜩한 총기들이었다. 이날의 ‘커뮤니티 봉사’는 총기의 공개 휴대(open carry) 권리를 과시하기 위한 이벤트였다.
하루 전 LA 노스힐스의 한 아파트에선 7살 형이 쏜 총에 2살짜리 동생이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아빠가 잘 ‘보관’해 둔 권총을 옷장에서 찾아낸 아이가 장난감인 줄 알고 가지고 놀던 중에 빚어진 참사였다.
이번 주 초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의 한 직장에선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졌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아와 아이들 양육권 문제로 다투던 37세 남성이 여자친구를 쏘고 다른 종업원들을 향해서도 무차별 난사를 한 후 자살했다. 결국 그의 권총에 3명이 목숨을 잃고 4명이 부상당했다.
지난달 남가주 레스토랑에선 50대 남자가 식사중인 딸의 가족에게 총격을 가해 사위와 손자를 살해했고 댈러스에선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다 말다툼이 벌어져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부부싸움 끝에 네 아이의 엄마가 남편의 총에 맞아 숨지고 10대 아들이 아버지의 총으로 자살하고…총기사망사건은 이제 ‘별’ 뉴스조차 되지 못한다. 그저 매년 미국에서 총에 맞아 숨지는 3만명 중 일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강도나 갱이 아닌 보통사람 손에 들린 총에 의한 비극이 계속되고 있는데 미국사회의 분위기는 ‘총기규제’가 아니다. “나도 무장하겠다. 방어권을 인정하라”는 외침이 대세다. 이미 총기의 공개 휴대를 허용한 주는 캘리포니아를 비롯, 40여개 주에 이른다. 식당과 공원, 타운홀 미팅에까지 총 차고 나타나는 이들의 기세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이다.
6월말 연방대법원은 28년간 권총소유를 금지시켜온 시카고의 시조례를 무효화시켰다. 2008년 워싱턴DC의 권총금지법에 위헌 판결을 내리며 명시한 ‘수정헌법 제2조가 보호하는 개인의 총기소지 권리’는 연방만이 아니라 주 및 지역정부도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라고 판정한 것이다. 총기소유권이 언론 표현의 자유나 종교 집회의 자유처럼 우선적으로 보호받는 동등한 수준의 기본 권리로 격상된 셈이다.
예상했던 결과니 놀랄 건 없었지만 시카고 시당국은 불만을 감추지도 않았다. 사실 시카고의 총기피해는 심각하다. 지난 한해동안 총격을 당한 공립학교 학생수가 258명에 이른다. 그중 32명이 숨졌다. “대법관들은 현실을 너무 모른다. 총기폭력의 양상을 인식 못하는 것 같다”고 개탄한 리처드 데일리 시장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권총소지 금지법이 무효화되었으니 새 조례를 마련해야 한다. 시의회가 새 조례안을 45대0,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은 판결 나흘 후인 지난 2일이었다.
대법원 판시에 따라 금지는 물론 풀었다. 1982년 이후 처음으로 시카고 주민들은 권총을 소유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갖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주부터 발효된 새 법은 ‘미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총규제 조례’로 불러 손색이 없을 만큼 엄격하기 짝이 없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온 시카고의 반격이다.
당장 소송이 제기되었다. 발효도 되기 전인 지난주에 총기소유주 4명과 총기상들이 새 조례안을 들고 다시 법정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하긴 새 조례안 내용을 보면 약이 오를 만도 하다. 준수하려면 상당한 인내심과 적지않은 비용이 필요하다 :
우선 권총소지는 집안에 한한다. 집 건물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가지고 나가지 말라. 차고나 포치나 뒷마당도 안된다. (차고에 침입한 강도를 총기로 방어하면 위법일까?)
총기소유주는 시에서 면허를 받고 모든 총기를 등록해야 한다. 면허비는 100달러, 등록비는 1정당 15달러, 사전에 4시간의 안전교육과 1시간의 사격훈련을 받아야 한다. 절차가 끝나려면 4개월이상 기다려야 한다.
시카고 시내에서는 총기상도, 사격연습장도 오픈할 수 없다. (어디서 총을 사고 사격연습을 해야 하나? 시카고는 총기판매와 훈련의 책임을 교외지역으로 떠넘기려는 것인가)…
법학자들은 새 조례안의 일부조항엔 위헌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지레 겁먹고 움츠려 들 것은 없다. 2008년 DC 판결이후 총기규제법들을 겨냥한 위헌소송이 잇달았지만 대부분 기각되었다. 시카고의 반격도 완패하진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총기피해 대책은 보다 강력하면서 ‘위헌 선’을 넘지 않는 스마트한 규제안 마련이다. 총기권 옹호자들의 손을 들어 준 연방대법원도 필요한 규제를 위한 문까지 닫아걸지는 않았다.
연방대법원이 인정한 총기소유 권리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판결문은 각 지역의 ‘합리적’ 총기규제법엔 관여하지 않겠다며 총기소유권이 제한적 권리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규제가 합리적인지에 대한 지침은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합리적인 규제인가 - 이제부터 총기논쟁은 대법원이 남겨준 이 숙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민간인의 총기 공개휴대를 금지하는 법안이 최근 주하원을 통과했다. 주 상원도 통과하기 바란다. 마음을 쉬기위해 들른 커피샵에서, 바닷가에서 권총 찬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진 않으니까.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박록 /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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