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나 케이건의 연방대법관 인준을 지지합니까?” “글쎄요, 케이건에 대해 잘 몰라서 대답하기가 힘든데요” 월스트릿 저널의 여론조사에서 57%가 이렇게 응답했다.
지난해 이맘때쯤 연방상원 인준청문회를 가졌던 소니아 소토마요 대법관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응답은 17%에 불과했었다. 하긴 케이건에겐 가난한 이민 소녀의 아메리칸 드림 실현이라는 감동적인 라이프 스토리도 없다. 여성이란 점을 제외하곤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나 아이비리그를 섭렵한 백인 엘리트의 전형이다.
게다가 오바마 대통령이 그를 대법관으로 지명한 5월10일 이후 대형 뉴스가 연달아 터졌다. 유권자의 분노가 폭발한 각 주의 예선, 멕시코만의 오일 유출,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의 인터뷰 파문과 경질…미디어도, 국민도 케이건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는데 이에 더해 인준 청문회를 시작하는 날 51년 경력의 로버트 버드 연방 상원의원이 타계했고 다음날엔 신임 아프간 사령관 데이빗 퍼트레이어스 장군의 청문회도 시작되었다…지독히도 ‘뉴스 운’이 없었던 셈인데 버드 장례식이 내일로 잡히는 바람에 청문회 일정마저 하루 앞당겨 끝내야 할 형편이다.
조용하고 빠른 인준을 원하는 백악관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미국에 사는 누구에게나 대법관 청문회는 남의 일일 수가 없다. “크레딧 카드를 사용합니까? 일을 합니까? 물을 마십니까? 그렇다면 당신들은 모두 대법원의 영향을 받습니다”란 앨 프랑켄 상원의원의 지적처럼 대법원은 우리들의 일상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28일부터 시작된 케이건 청문회는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한 두차례 불꽃도 보이면서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케이건에겐 지난해 소토마요의 ‘현명한 라티나’같은 아킬레스건도 없다. 그래도 하나 들자면 ‘공허한 촌극(hollow charade)’이다. 15년전 젊은 법대교수 시절 케이건 자신이 쓴 글에서 상원 인준 청문회를 사정없이 깎아내린 내용이다. 케이건은 로리뷰에 실린 기고를 통해 청문회가 대법관 지명자의 진지한 법철학을 파악하는 활발한 문답은커녕 진부한 말만 반복되는 ‘공허한 촌극’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명석한 젊은 교수 케이건의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극우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한 로버트 보크의 인준이 부결당한 1987년 이후 상원 법사위의 대법관 인준 청문회는 존재 가치를 상당부분 상실했다. 지명자들은 솔직한 견해가 아니라 상원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지지 못하도록 정리한 답변으로 무장했다. “대법원은 입법부가 아니다” “선례를 존중하는 겸손한 대법관이 되겠다”는 진부한 약속을 반복할 뿐 논쟁의 불씨가 될 만한 의견표명엔 입을 다물었다.
철저한 자격검증이 불가능해진 청문회는 민주·공화 양당의 이념이 대립하는 정치적 제스처 게임의 한마당이 되어 왔다. 케이건 청문회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법관 경력이 없어 트집근거가 적은 케이건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더구나 양당의 의회주도권이 달린 중간선거가 5개월도 채 안남은 시점이 아닌가.
본격적 질의응답이 시작된 청문회 둘째 날, 케이건은 자신의 95년 주장에 대해 꼬리를 내렸다 : “당시 나의 비판이 지나쳤다. 지명자의 입장을 이해 못했다” 그리고는 그 자신도 곤란한 질문엔 ‘진부한’ 답변으로 우회해 가며 ‘공허한 촌극’의 한마당을 거들었다.
입을 아주 다문 것은 아니었다. “헌법이란 그것을 적용하는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그 의미도 계속 변하는 것이며 건국의 아버지들도 헌법이 시대변화에 적응하도록 제정했다”라는 헌법에 대한 견해를 솔직히 토로했고 “나의 정치시각은 진보적이지만 나의 판결과는 완전 분리될 것이며 반드시 그래야한다”고 못 박기도 했다.
청문회 이틀째엔 제법 불꽃 튀는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공화당 제프 세션스의원은 날카로운 질문으로 사정없이 압박했고 침착한 케이건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되받아쳤다. 열띤 공방전의 이슈는 군대의 동성애 정책. 세션스는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군의 동성애자 차별정책을 반대하는 케이건이 하버드 법대학장시절 캠퍼스내 모병업무를 고의적으로 제한시켰다고 지적했고 케이건은 군의 차별정책과 하버드의 차별거부 정책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위해 모병창구를 비공식 채널로 단기간 바꿨던 것뿐이라고 반박했다.
세션스는 군에 대한 케이건의 ‘적대감’을 폭로하고 싶어했고 케이건은 군에 대한 자신의 ‘존중과 경의’를 거듭 강조했다. 공방전의 스코어는? 세션스의 공격이 케이건 인준 반대의 분위기 형성엔 역부족이었으니 케이건의 승리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케이건에 대한 질의응답이 끝난 어제 그에게서 구체적 답변 듣기를 포기한 민주당의 알렌 스펙터 의원이 탄식하듯 말했다. 인준 반대(위협)를 하지 않고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방법이 없을까” - 긴 청문회를 거쳤지만 아직 민주당은 케이건이 ‘진짜 우리 편인가’, 확인하지 못했고, 공화당은 중도의 탈을 쓴 ‘사법부 리버럴 운동권은 아닐까’, 우려를 씻지 못한 것이다. 케이건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여유롭게 유머까지 섞어가며 별 상처 없이 관문을 통과한 케이건은 7월 중순 법사위 표결을 거쳐 7월말 상원 본회의 표결을 통해 무난히 인준될 것으로 보인다. 90세 최고령 대법관이 물러나는 자리에 50세 최연소 대법관으로, 사상 4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입성하여 새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박록 /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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