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 LA 오페라의 역사적인 링 사이클(Ring Cycle)이 막을 내렸다. 2년을 준비하고 3,100만달러를 들여 지난해 2월부터 올해 6월 말까지 총 4차례에 걸쳐 공연된 반지 대장정을 나는 두 차례 풀로 관람했다.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발퀴레’(Die Walkure), ‘지그프리트’(Siegfried), ‘신들의 황혼’(Gotterdammerung), 4부 전체 공연이 19시간(인터미션 포함)에 이르는 길고 장엄한 이 대하 오페라는 감상에만도 격한 감정이 소요되는 작품이라 초보자에게는 에베레스트 등반과 같다고들 한다. 그러나 독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가 만든 ‘링’은 내게 전혀 험준한 산이 아니었다.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전 4편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홀리듯 구경했다. 지난해 2월 ‘라인의 황금’을 처음 봤을 때 서먹서먹했던 추상적 이미지들은 ‘발퀴레’와 ‘지그프리트’로 넘어가면서 마력을 발하기 시작했고, ‘신들의 황혼’에 이르렀을 땐 완전히 그 세계에 빠져들었으며, 배우들과 오케스트라의 공연도 계속 화려하게 진화했다.
아힘 프라이어의 추상적 이미지 연출
사이클 거듭될수록 독특한 마력 발휘
배우·오케스트라 공연도 갈수록 진화
나는 일차 초연을 모두 본 후 사이클 2의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를, 사이클 3의 ‘지그프리트’와 ‘신들의 황혼’을 관람했는데 사이클이 거듭될수록 초연 때 느낄 수 없었던 바그너 사운드의 감동이 고조됐고, 그 독창적인 무대 해석에 경외감을 갖게 되면서 마지막 사이클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는 가슴이 벅차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중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공연한 링 사이클을 DVD로 보았는데, 미안하지만 그런 공연이라면 두 번 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음악은 좀 더 웅장하였지만 전통적인 무대 프로덕션이 너무 평범하고 지루해서 도저히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좋은 추상미술을 보고난 후 평범한 구상작품을 대하면 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그런데 이것은 나만이 아니라 이번 링을 본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로, 처음에 가졌던 낯선 느낌이 나중에 완전히 변했다고들 말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아힘의 무대가 다른 링과 너무 다른데서 오는 놀라움과 우리 눈에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마음이 닫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모두들 아힘의 팬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동안 이것저것 트집 잡는 기사를 써댔던 LA타임스도 28일자 최총 리뷰에서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사이클은 LA 오페라의 완전한 승리였다. 무대와 관객 모두 전체적인 무드가 변했고,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과 플라자에는 축제 분위기가 만연했다.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은 기대 이상으로 수준이 향상됐고, 연출가 프라이어는 마지막 날 커튼콜에서 귀청이 떨어질 듯한 환호 속에 영웅이 됐다. 이 쇼는 이제 LA의 전설이 됐다”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이 링 사이클을 4차례 모두(총 16회), 드레스 리허설까지 합하면 30번 이상 관람했다는 이주헌 오페라협회 보헤미안 회장은 지난 2년 동안 흥분 속에 지켜봐온 링 사이클이 끝났다는 사실에 진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오리지널 링 무대인 독일 바이로이트의 것은 물론 뉴욕, 시애틀, 오렌지카운티, 롱비치에서 공연된 링을 모두 관람했다는 이 회장은 “링이 LA에서 상연되었다는 것은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고 레이커스가 NBA 챔피언이 된 것, 아니 올림픽이 LA에서 거행된 것만큼이나 오페라 팬으로서는 대단한 일”이라고 말하고 “아힘 프라이어의 뛰어난 링 프로덕션으로 인해 LA가 진정한 문화도시로 발돋움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바이로이트에 두 번 다녀온 바그너 매니아 김용제 박사(치과의, 바이얼리니스트)도 “처음엔 너무 기계적이고 현대화 된 프로덕션이라는 느낌이 들어 좀 이상했으나 자꾸 볼수록 익숙해지면서 나중에는 아주 즐겁게 감상했다”고 말하고 “특히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의 연주가 상당히 수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의 음향효과가 좋지 않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고 평했다.
지난 한달 간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는 미 전국과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링 매니아들로 가득차면서 매 공연 풀 하우스를 이뤘다. LA 오페라에 따르면 4차례의 링 사이클에 판매된 티켓은 8만7,453장이었고, LA 전역에서 펼쳐진 1,000여건의 링 페스티벌 행사에 참가한 사람이 30만명을 넘어섰다. LA 오페라는 이 공연으로 빚더미에 올랐지만 빨리 더 모금해서 또 다시 이 멋진 링을 볼 수 있게 되기를 학수고대하는 팬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LA 오페라가 다시 링을 올리는 일은 현재로선 5~8년 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예상이다. 재정적으로도 어렵지만 바그너를 공연할 수 있는 가수가 전 세계적으로 너무 적어서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아힘이 2003년 LA 오페라에서 만든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The Damnation of Faust)를 2년 후 다시 공연하기로 했다니, 그때 다시 그의 특별한 프로덕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뒷얘기를 전하자면 이 ‘링’을 한국으로 가져가기 위한 계획이 최근 추진됐었다. 전 세종문화회관 사장이며 서울 시립오페라 단장을 역임한 김신환 한국 성악회 회장이 이번 링 사이클을 관람한 후 아힘과 도밍고를 비롯한 LA 오페라 관계자들과 서울 공연을 논의했으나 비용 면에서 타산이 맞지 않아 현재 보류된 상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양측 계속 노력중이기 때문에 어쩌면 몇 년 내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LA 오페라의 링 사이클이 오를지 모를 일이다.
아힘 프라이어의 ‘링’은 오페라가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보여준 공연이었다. 예술이 우리를 자극하고 도전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아힘은 LA에 현대인의 감성을 뒤흔드는 오페라 예술을 던져주고 간 셈이다.
<정숙희 기자>
초현실적 이미지가 빛나는 아힘 프라이어의 ‘링’ 무대. 지그프리트와 라인의 처녀들이 공연하고 있다.
지그프리트 역의 존 트렐리벤.
브룬힐데 역의 린다 왓슨.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