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9일 브라질, 월드컵 사상 최대 이변 중 하나가 발생했다 : 우승확률 500대1의 언더독 미국이 세계 최강팀 영국을 누르고 승리를 거둔 것이다. 우체부와 광부, 교사와 식당 보조가 본업인 파트타임 선수들로 이루어진 반 아마추어 팀에게 축구 종주국 영국이 1대0으로 침몰당한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전 세계 언론들은 다투어 톱뉴스로 보도했고 영국에선 10대0 승리가 잘못 타전된 듯해 스코어 보도를 유보할 정도로 믿기 힘들어 했다.
정작 미국의 언론은 무관심했다. 그날 선수로 뛰었던 월터 바르는 지난 봄 CNN에게 간직하고 있던 당시의 필라델피아 신문을 보여주었다. 세계를 흥분시킨 ‘잔디위의 기적’이 짤막한 단신으로 시큰둥하게 실려 있었다.
무관심의 대가였을까. 미국이 다시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1990년부터 지난 20년간은 빠짐없이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고 2002년엔 8강 진출에도 성공했지만 미국에게 축구는 ‘못 봐도 별로 그립지 않은’ 덤덤한 상대로 계속 머물러 왔다.
4년마다 6월 중순 무렵부터 한 달간 미국은 ‘왕따’가 된다. 전 세계를 몰아치는 뜨거운 축구열풍의 무풍지대가 미국이다. 축구의 제전, 월드컵이 시작되면 남미와 유럽에서 독감처럼 퍼지는 생산성 저하를 걱정할 일도 없고, 한밤중에 전 국토 전 국민이 한 몸이 된 듯 터져 나오는 환성과 탄식은 이해도, 공감도 힘든 이상한 나라의 낯선 이야기다.
월드컵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FIFA(국제축구연맹)의 회원국은 유엔의 가입국보다 많고 월드컵의 인기는 올림픽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높다. 어쩌다 본선에 진출한, 이름조차 생소했던 조그만 섬나라의 필사적 투혼이 전 세계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힘겹게 들어간 한 골이 민족의 자존심으로 승화되면서 수십억 인구를 TV앞에 끌어 모으는 월드컵은 이제 누가 뭐래도 지구촌 최고의 축제로 부상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에게 축구는 ‘외국인의 경기’다.
그래서 4년마다, 월드컵 개최 무렵이면 미국의 언론들이 반복하는 기사가 있다 : 왜 미국은 축구에 열광하지 않는 걸까.
사실 축구가 미국에 아예 발을 못 붙였던 것은 아니다. 축구애호가들의 적극 추진 속에 1920년대와 197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에서 상당히 활기를 띤 적이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축구 매니아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발 벗고 나서 월드컵 미국개최도 실현시켰었고 96년엔 메이저리그사커(MLS)도 출범했다. 94년 미국 월드컵 흥행도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결승전 시청률은 수퍼볼의 10%에 불과했고 월드컵을 모른다는 미국민이 70%에 달했다. 2007년 LA 프로축구팀 갤럭시가 파격적 조건으로 영입한 세계의 축구스타 데이빗 베컴도, 빠르게 확산되는 유소년 축구팀들도 미국사회에 축구 붐을 일으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왜 지구촌 전체가 환호하는 ‘세계의 스포츠’에 유독 미국인만은 하품을 하는 것일까. 언론들의 해설이 분분하다. 축구가 시작된 영국과의 껄끄러운 식민지 관계에서 시작되는 역사적 분석은 미국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풋볼·야구·농구의 빅3 스포츠가 폭넓게 정착해 있어 아무리 부유한 스포츠 강국이라 해도 미국엔 이미 축구의 자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가 하면 미국의 축구는 교외지역 중산층 자녀의 취미생활, 캐주얼 스포츠여서 빅3 스포츠처럼 뛰어난 스타 선수를 키울 여건이 아직 안되고 스타 없는 스포츠는 재미없다는 지적에서 쉬는 시간 없어 화장실가기 불편하다, 치어리더 없어 심심하다는 투정까지 축구가 시큰둥한 이유는 무궁무진 다양하다.
보통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내세우는 이유는? “축구는 잔디밭에서 공을 차며 직접 하기는 재미있지만 관전하기엔 점수가 너무 안나 지루한 게임이지요. 90분 죽어라 뛰는 걸 열심히 보았는데 무승부라니요? 구체적 스코어를 선호하는 미국인들의 DNA엔 맞기 힘든 스포츠입니다” - 한 축구 블로그에 올라온 의견이다.
그러나 미축구연맹 수닐 굴라티회장은 “이미 미국은 축구국가”리고 단언한다. 그는 무엇보다 축구를 하며 자라는 수백만 젊은 세대를 미국축구 미래의 든든한 저변인구로 꼽는다. 글렌 벡같은 극우보수주의자들이 “우린 월드컵을 싫어하고 축구를 거부한다”고 외치는 것과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라틴계와 동양계 이민인구의 증가도 한몫을 할 수 있다. 오바마와 빌 클린턴, 전현직 대통령들이 2018년 혹은 2022년 월드컵 유치를 적극 추진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긴 금년엔 좀 달라졌다. 열기까지는 못 되도 온기는 느낄 수 있을 듯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 경기의 티켓을 가장 많이 산 것도 미국인들이고 FIFA에 가장 비싼 중계료를 지불한 것도 미국의 방송사다. 여전히 강팀인 영국과 60년만의 재대결에서 무승부로 선전한 것이 관심을 끌면서 시청률도 2006년보다 2배로 뛰었다. 16강, 8강 진출에 성공한다면 그렇게 고대하던 축구열풍이 갑자기 몰아닥칠지 누가 아는가. 4년 후엔 미국인은 왜 갑자기 축구에 열광하는가에 대한 분석이 쏟아져 나올 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아이들은 ‘대~한민국’과 함께 ‘USA’를 외치느라 한층 밤잠을 설칠 것이다.
박록 /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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