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 카파미술상’ 비디오-애니메이션 작가 이가경
그리고 지우고 새기고 갈아내고 찍기를 반복
손으로 작업한 드로잉,판화 통해 감성 자극
낙서 같은 단순한 이미지로 인간 실존성 표현
화면에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뛰기 시작한다. 숨을 헐떡이고
콧물까지 흘리며 정신없이 쳇바퀴를
돌던 그는 돌연 멈춰선다. 그리고 서서
하늘을 본다. 그제사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아름다운 천연색이다.
<‘슬로우 다운’ 3분>
다른 화면. 이번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무수한 사람들이 길을
오간다. 앞을 향해 부지런히 걷는다.
걷는 사람들의 뒤로 그 움직임의
흔적들이 계속 따라간다.
<‘무제-그랜드 아미 플라자’ 35초>
또 다른 화면. 엄마가 어린 두 딸과
함께 사진 찍으려고 서 있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꼬무락거리는
두 아이를어르고 달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고, 세 모녀가 간신히
포즈를 맞춘 순간, 찰칵.
<‘가족사진’ 46초>
2010 카파미술상을 수상한 이가경은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images)의 작가다.
만화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그림들이 걷고, 샤워하고, 아이를 업고, 설거지한다. 어쩌면 우리가 어릴 때 공책에 낙서하던 그림과도 닮은 단순한 이미지들이 꼬물꼬물 차박차박 이어가는 그 일상의 움직임과 함께 말소리, 휘파람 소리, 걷는 소리, 자전거 지하철 자동차 소리, 물소리,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가경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단 난해하지 않아서 마음에 쉬 다가온다. 대개의 현대미술이 보는 사람의 지성을 요구하는 반면, 그녀의 작품은 감성을 먼저 두드린다. 작가의 의도를 잘 모른다 하더라도, 단순한 동화적 이미지의 움직임에 누구라도 쉽게 젖어드는 것-그것이 작가 이가경의 파워이며 매력이다. 3명의 카파상 심사위원(리아 올맨-LA타임스 미술비평가, 베넷 심슨-MOCA 큐레이터, 캐롤 엘리엘-LACMA 큐레이터)이 드물게 만장일치로 그를 선정한 것도 아마 그처럼 신선한 창조성에서 찾아지는 서정적 보편성 때문일 것이다.
이가경의 소재는 일상이고, 주제는 반복이다. 그는 자신의 일상이자 우리 모두의 것인 모습을 작품에 담는다. 그에게 반복은 살아가는 것, 사는 것이 곧 반복이라고 말한다. 그 단순한 쳇바퀴가 애잔하고 고달프게 다가오는 것은 거대한 사회 속에서 익명의 개인으로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인간 실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엄청나게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비디오로 보기엔 몇십초에서 몇분 정도 움직이는 짧은 동영상이지만 그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그리는 이미지는 적어야 수십 내지 수백장, 많게는 수천장에 달한다.
애니메이션은 두가지 방식으로 제작된다. 차콜이나 연필로 그린 흑백 드로잉과 플렉시 글래스에 새긴 판화가 그것이다. 드로잉은 종이에 수백개의 연속된 이미지를 그려서 만드는 작업인데 특이한 것은 그림을 수백장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 장의 종이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사진으로 찍은 후 그림을 지우고, 그 위에 다음 장면의 그림을 그리고 사진 찍고 또 지우고, 또 그 위에 그리고 사진 찍는 일을 반복하면서 움직임을 만들어간다. 결국 남는 것은 마지막 그림 한 장과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들이다.
그보다 어려운 것은 에칭으로 작업하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는 아주 두꺼운 플렉시 글래스를 사용해 판화를 한 장 새겨서 종이에 찍은 다음 사포로 그림을 지운다. 그 위에 또 다른 그림을 새겨 넣고 또 찍어내고, 다시 그림을 갈아내고 새로 그려 또 찍고, 그렇게 수십 수백장을 그리고 지우다보면 남는 것은 종이처럼 얇아진 플래스틱 한 장이다. 에칭 작업은 각 장면을 3장씩 판화로 찍어 남겨둔다고 한다.
이렇게 그리고 찍어낸 수십 수백장의 이미지를 컴퓨터로 이어 붙여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든다. 동작 하나 하나를 그려서 이어 붙인다는 점에서는 일반 애니메이션과 다를 바 없으나 각 그림이 드로잉과 판화라는 점이 특별하다. 전 LACMA 큐레이터이며 카파(KAFA)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하는 하워드 폭스는 “현대는 애니메이션의 황금시대라 해도 좋을 만큼 컴퓨터로 만든 만화 이미지와 드로잉이 넘쳐난다. 그런데 이가경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전통적인 에칭 작업과 직접 손으로 그린 이미지들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 장 한 장에서 그녀의 손이 느껴지고 사람과 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가경은 원래 판화작가다. 홍익미대와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한 그는 2001년 뉴욕주립대 퍼체이스(Purchase) 칼리지 대학원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공부할 때 판화를 슬라이드 쇼로 만들어 음악을 넣어보았는데(이때 만든 작품 ‘여행’(Journey)이 아주 좋다) 한 교수가 판화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해 지금의 작업을 시작했다. 마침 그때 남아공화국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가 뉴욕에서 전시회를 가졌는데 목탄 밑그림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가져다 무빙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2004년 한 사람의 일상을 3개의 공간(오피스, 지하철, 아파트)을 통해 보여주는 7분짜리 작품 ‘선인장 물주기’(Sprinkling the Cactus)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이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워싱턴 국립박물관, 스투트가르트 등지에서 전시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2007~2008년에는 작가 일상의 반복행위들을 묘사한 ‘데이 시리즈’(Day Series)를 만들었다. 흑연과 모노톤의 에칭을 이용한 5개의 짧은 무빙 이미지 작업으로, 이중 걷는 이미지의 작품은 클로드 피카소(피카소의 아들)가 구입했다.
2009년 만든 ‘무제-그랜드 아미 플라자’(Untitled-Grand Army Plaza)는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매주 일요일 서는 시장 앞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반복적인 인파의 행렬을 표현한 작품이다. 미의회 도서관이 구매해 소장하고 있다.
종이 위에 차콜로 그려 제작한 ‘걷기’(Walk, 2009)는 엄마가 나지막이 부르는 동요 ‘섬집아기’를 배경음악으로 길을 걸어가는 내용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뒤편으로 그가 걸어온 흔적이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붙어 그 길을 채운다.
이가경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움직이는 잔영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전 그림을 말끔히 지우지 않고 흔적을 살려둠으로써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움직임 속에 그 흔적도 함께 잔영을 이루며 나아간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가 시간과 공간을 통해 남기는 흔적들, 일상이 쌓여서 이루는 역사와 일상의 잔영을 표현한다.
이가경은 요즘은 작업에서 스토리를 최대한 없애고 일상적 행위의 이미지에만 집중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복행위 안에서의 여러 층(layer)을 찾는 작업으로서 반복성 안에서 찾아지는 다양성, 일상에서 겹쳐지고 지워지는 그 속의 것들을 탐구해보는 작업이다.
하찮아 보이는 반복행위들을 움직이는 이미지로 재창조함으로써 사람과 삶을 단순하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이가경의 계속될 작업이 무한히 기대된다.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가경은 보다갤러리, 한전갤러리, 인사미술공간 등 한국에서 3회, 뉴욕에서 1회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 및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동화책 일러스트레이션과 기발한 설치작업도 하고 있으며, 내년 봄 LA 한국문화원의 카파상 수상전에 이어 6월에 뉴욕 퀸즈에서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그의 작품은 연방의회 도서관과 클로드 피카소(피카소의 아들), 부산시립미술관이 구매했다.
<정숙희 기자>
작가 일상의 반복행위들을 5개의 짧은 무빙 이미지 작업으로 묘사한 ‘데이 시리즈’(Day Series).
3분짜리 애니메이션 ‘슬로우 다운’의 마지막 장면.
작품 ‘무제-그랜드 아미 플라자’를 배경으로 선 비디오 애니메이션 작가 이가경.
<왕휘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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