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에 여성 대법관 지명을 구체적으로 고려한 것은 1940년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적임자도 있었다. 오하이오 주 대법관을 역임한 후 첫 여성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재직 중인 플로렌스 알렌이 어떠냐고 트루먼이 묻자 대법관들은 모두 반대했다. 이유가 기막혔다. “아니, 심의할 땐 타이 풀고 구두 벗고 일하는데 여성이 있으면 어떻게 그러느냐!”
이렇게 사수한 남성일색의 대법원은 1981년 레이건의 선거공약 실현으로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입성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견고한 유리천장을 뚫고 첫 여성 연방대법관으로 오를 때까지 오코너가 겪은 차별은 만만치 않았다. 스탠포드법대 재학시 스탠포드 로 리뷰의 편집장을 지냈고 3등으로 졸업했지만 로펌들은 여성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았다. 군 소속 민간변호사, 카운티 검사 등으로 일하다 고향인 애리조나로 돌아가 한 쇼핑몰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가 대법관으로 출근한 첫날, 여자화장실이 없어 당황했던 경험은 대법원의 유명한 일화다.
차별을 딛고 ‘쟁취한’ 여성성공의 상징인 그는, 그러나 여성을 포함한 마이너리티 권익옹호에 특별히 앞장서지 않았다. 보수적인 공화당 소속이기도 했지만 “페미니즘이란, 불평을 멈추고 스스로 실현하는 것”이라는 오코너의 신념을 알고 있는 여성계도 그에게 마음 놓고 기대지 못했다.
두 번째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는 달랐다. 대법원 입성 전 부터도 여성운동에 적극적이었다. 93년 클린턴 때 취임한 그는 2005년 오코너가 은퇴한 후 지난해 라틴계 소니아 소토마요가 3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합류할 때까지 다시 ‘유일한’ 여성 대법관이었다.
작년 2월 오바마 첫 의회연설때 긴스버그가 참석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3주 전 암수술을 한 76세 노법관의 건강을 우려했지만 긴스버그는 미 전국에 생중계되는 자리이므로 “연방대법원에 여성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긴스버그는 “나는 ‘어퍼머티브 액션의 산물”이라고 늘 강조한다. 컬럼비아법대를 공동수석으로 졸업한 그도 로펌에 취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3년 후 모교의 교수로 채용되었다. 미국 최초의 여성 종신직 법대교수였다. 당시 닉슨행정부가 모든 대학에 마이너리티 종신직 교수를 채용토록 한 소수계 우대정책을 시행한 덕분이었다.
자신의 대법관 청문회 때 긴스버그는 상원의원들에게 말했다 : “난 내 생애 중 3명, 4명, 어쩌면 그보다 많은 여성들을 대법관 석에서 보리라고 기대합니다…”
이번 주 미국은 긴스버그의 기대 실현을 향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10일 오바마가 엘레나 케이건을 112번째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한 것이다. 여성으론 4번째다.
연방대법관 선정에서 여성과 소수계의 적극 등용이 촉구되는 것은 대법원의 판결 하나하나가 보통사람들의 일상에 직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헌법의 정확한 해석을 근거로 내려지겠지만 판결 속엔 각 법관의 경험과 사고방식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변화하고 있는 미국의 다양한 면모가 대법원에도 반영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지명 첫날부터 케이건에겐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지고 있다. 앞으로 상원법사위 청문회까지 한달 넘게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과제이긴 하지만 일단 공격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판사경력이 없다” - 대법관 못지않게 법조계 최고 지위로 꼽히는 하버드법대 학장과 법무차관(Solicitor General: 연방정부의 대표 변호사)을 역임했으므로 자질부족이란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연방대법원 법정에서 존 로버츠 대법원장에 뒤지지 않는 지성을 바탕으로 뜨거운 공방전을 벌이며 로버츠를 열나게 했다는 뒷이야기도 떠돈다.
판사경력은 없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는 인종통합교육 판결 당시 9명 대법관 중 1명만이 판사 출신이었다. 또 보수진영이 숭배하는 윌리엄 렌퀴스트 전 대법원장도 판사경력이 없었다.
둘째, “당신은 누구인가” - 중도 진보로 알려진 케이건에 대해 극우보수파는 너무 진보적이라고 반대하고 극좌진보파는 너무 보수적 아니냐고 우려한다. 묻고 싶은 게 많을 것이다 : 당신은 낙태를, 총기소유권을, 대통령 권한 확대를 지지합니까, 당신은 소문대로 동성애자입니까…그런데 우려나 반대를 증명해줄 자료가 별로 없다. 그의 법적 견해를 밝히는 기록이 드물기 때문이다.
청문회때 그 자신에게서 직접 듣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똑똑하고 신중한 그가, 자격 검증보다는 당파대립의 격전장이 되어 온 청문회에서 트집잡힐 대답을 하겠는가. 그의 인준이 낙관되는 근거다.
케이건이 인준되면 올해로 220주년을 맞는 연방대법원엔 3명의 여성 대법관이 포진할 것이다. 지난달 긴스버그는 조지타운대학에서 여성의 사회진출 스피치를 통해 젊은 후배들에게 말했다. “진전은 천천히 이루어지고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먼 길을 왔습니다. …”
이미 미국의 20개주 대법원장은 여성이다. 변호사의 25%도 여성이다. 3명이나 4명을 넘어 5명, 여성 다수의 대법원도 막연한 희망사항은 아니다. 현재 미국 법대생 전체 중 여학생 수가 절반을 넘어섰다는 통계가 그 날이 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박 록 / 주 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