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 애리조나” - 이틀 전 LA타임스의 사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민권침해 위헌소지가 다분한 애리조나 주의 새 이민단속법을 강력히 비난해온 타임스는 감사 이유를 설명했다 : “그동안 상원의원, 사회운동가, 대통령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이민’을 주요 어젠다로 되살려 놓은 것이다”
정치인 모두가 중대한 과제라고 강조해왔고 수천 수만명이 운집한 시위도 거듭 열렸지만 경기침체의 와중에서 이민개혁은 백악관에서도, 의회에서도 계속 뒤로 밀려왔고 뉴스의 관심권에서도 멀어졌다. 그런데 마침내 불이 지펴진 것이다.
지난 주말 주지사의 서명으로 확정된 애리조나의 ‘비인도적, 비상식적, 인종차별적, 악의적, 반이민법’에 대한 거센 역풍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이민개혁 이슈가 갑자기 뜨거운 논란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이민자가 신분증명서류를 지참안하면 범죄’로 간주하는 애리조나의 초강경 단속을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양측이 팽팽히 맞서다 동의하는 한마디… “포괄적 개혁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불법이민 문제를 방치한 연방의 책임이 크다”
오만한 백인우월주의 집단으로 매도당하고 있는 애리조나 주민의 입장을 설명하며 한 지역신문도 지적했다. “애리조나는 인종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외딴 섬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당신들이다. 이건 무책임한 연방정부가 초래한 미국의 문제, 당신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불법이민의 수퍼하이웨이로 시달려온 애리조나를 희생양으로 모는 대신 우리도 싫어하는 이 악법을 연방이민제도 개혁 추진의 촉매로 삼아야한다”
처음부터 이민들로 이루어진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 망가진 이민제도를 개혁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하고 타당한 과제다. “방치하면 제2, 제3의 애리조나가 속출할 것”이란 경고도 나왔다.
그러나 워싱턴정가의 기상도는 좀 다르다. 정치 이슈로서의 ‘이민’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요즘처럼 현직들의 정치생명이 풍전등화인 불만의 시대에 선거를 앞둔 정가에선 시한폭탄처럼 아무도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이슈다. 이민개혁안의 금년 내 처리는 물 건너갔다는 것이 지난주까지 묵인된 정설이었다.
그런데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해리 리드가 지난 주말 이민개혁안을 당장 최우선과제로 처리하겠다고 밝히면서 연방의회가 벌집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공화당 상원에서 유일하게 초당적으로 협력해온 린지 그래엄의원이 리드의 돌발 플랜에 반발하여 이민개혁안 뿐 아니라 동시에 추진해오던 기후변화법안에 대한 협력 철회를 위협하면서 상원의 의사일정도 혼선에 직면했다.
현재 이민개혁은 민주·공화 양당 모두에게 곤혹스런 양날의 칼이다.
비슷하게 재선위기에 처한 민주당 의원들도 지역에 따라 이해가 엇갈린다. 접전보수지역에선 ‘사면’이 포함된 개혁안 지지는 낙선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리드 대표의 네바다 같은 곳에선 히스패닉 표를 동원할 수 있는 단비가 될 수 있다. 그래엄이 리드의 이민법 전격추진이 자신의 재선을 위한 ‘정치적 책략’이라고 비난하는 근거다.
공화당 역시 민주당의 이런 내분을 보며 손뼉 칠 처지는 못 된다. 당장은 보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미 전국에서 가장 급성장 하는 인구인 히스패닉 표밭과의 영원한 결별을 의미한다. ‘반이민’이라는 낙인도 전국적 정당의 이미지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리드는 이민개혁안 강행을 재천명하고 있지만 한 걸음 물러서 살펴보면 전망은 여전히 ‘흐림’이다. 아직 법안 자체가 마련되지 못했고, 금융규제·기후변화·일자리구제 법안 등과 함께 신임대법관 인준청문회까지 처리사안이 밀려있는 상원의 일정이 또 하나 중대법안을 다루기엔 너무 빡빡하다. 리드가 법사위를 거치지 않고 본회의에 직접 상정하는 급행 전략을 동원한다해도 상원통과는 거의 불가능하다. 필리버스터를 막을 60표나, 공화당 협조는커녕 민주당내 반란으로 40표 확보도 어려운 것이 현재 상황이다.
초당적 이민법안의 공동작성자인 그래엄은 잘해야 2012년에나 성사될 수 있다고 못박고 있지만 민주당은 일단 상정하고 추진시킬 것으로 알려졌다. 통과시키지 못해도 히스패닉 유권자 동원에는 이만큼 효과적인 선거전략도 드물 것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가의 기상도에서 한가지 확실하게 읽혀지는 것이 있다. 급성장하는 히스패닉의 정치력이다. 이민단체 ‘아메리카 보이스’의 최근보고서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히스패닉 표로 당락이 좌우될 수 있는 선거가 하원 29, 상원 8, 주지사 3 등 41개라고 집계했다. 민주·공화 양당을 향해 “새로운 물결인 우리의 결집된 힘을 지켜보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파워다.
한인사회가 정치력 부재의 대가를 모질게 치렀던 4.29 폭동이 오늘로 18주년을 맞는다. 수십년 땀 흘리며 일궈온 삶의 터전을 속수무책 약탈당하고도 제대로 보상조차 못받았던 뼈아픈 체험을 한 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해온 그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정치력은 얼마나 성장 되었을까. 아니, 우리는 정치력의 필요성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한 것일까, 커뮤니티가 한번쯤 깊게 고민해 볼 과제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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