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공포는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렇지만 지휘관은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태산같은 무게로 부대를 장악할 뿐이다.
중공군의 1차 춘계 대공세(1951)에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면서 아군의 후퇴를 성공적으로 엄호하던 영국군 제 29여단의 투혼을 지난 회 본 칼럼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 다음은29여단이 후퇴할 차례였는데, 그 후퇴의 엄호를 맡은 글로스터 대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홀로 막으면서 여단 병력이 후퇴할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글로스터 대대가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상대한 중공군은 3개 사단의 27개 대대이니까 단순 계산으로 1대27의 전투였다. 거기에 공격제대가 전투의 주도권을 쥔다는 점을 감한하면 그 차이는 더욱 어마 어마한 것인데도 대대는 필사적으로 싸웠다.
싸우면서도 대대는 퇴로를 확보해 줄 아군의 구원부대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 부대가 오는 도중 중공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 퇴각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대대 병력 절반이 부상병이고 식량도, 탄약도 다 바닥이 난 상황이다. 그런데 구원부대도 안온다? 대대 부관이던 파라-하클리 대위(Anthony Farrar-Hockley: 나중에 대장까지 진급)는 절망적이였던 그 순간을 저서 The Edge of the Sword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4월 25일 밤이였다. 대대장 카니(James Carne) 중령이 불러서 갔더니 파이프에 담배를 눌러 담으면서 하는 말이 “구출 병력이 온다는 것 있잖아? 그거 못온데” 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져 않을뻔 했는데 대대장은 너무 태연하게 지나가는 말처럼 그러는 것이다. “그거 못온데.” 순간 나는 이건 사람이 아니고 무슨 바위덩이인가 싶었다”.> 그런데 대대장이 파이프에 성냥 불을 당기는 순간, 잠깐의 불 빛으로 부관은 대대장의 창백한 얼굴과 가늘게 떨리는 손을 보았다. 그 역시도 두려움을 아는 보통 사람이였던 것이다.
부대 단위로는 적에게 발각되기 쉬우니 각자 알아서 탈출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데니스 일병(당시 19세)이 대대장께 물었다. “우린 다 죽게되나요?” 그러자 2차 대전 때 아프리카 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던 대대장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다 죽진 않아. 아무리 그래도 살아 날 놈은 살더라.” 그 말을 듣고 데니스 일병은 자기도 모르게 씩 웃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너무도 태연한 대대장 옆에 있으니 마음도 평온해지더라고 했다.
후퇴할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부상병 후송이다. 겹겹히 둘러쌓인 중공군의 포위 를 뚫고 나가는데 어떻게 부상자까지 데리고 가나? 그래서 대대장은 부상병은 포기하고 걸을 수 있는 병사만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대대장 자신은 부상병들과 남아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군의관 히키 대위가 남고 의무 부사관 브리스랜드 상사도 부상병들 곁에 남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임종하는 부상병들의 고해의식을 집행하던 군종 신부 데이비스도 남았다. 그날 대대 일지(日誌)에 기록된 바로는 움직일 수 없는 부상병만375명이라고 했으니까 모두들 그야말로 몸을 던져 싸운 것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사상자 역시 7천명이 넘었다는 기록이다. 하여간1차 춘계 공세에서 서울을 향하려던 중공군 63군의 예봉은 여기 실마리 전투에서 일단 꺾였다고 봐야한다.
글로스터 대대의 설마리 전투 기록을 읽으며 내가 가장 감동을 받은 부분이 부상병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바로 이 마지막 장면이다. 한때 5대양 6대주 영국국기 유니언 잭이 펄럭대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大英帝國), 그 나라 군인의 명예와 긍지는 바로 이런것이구나 느꼈다.
대대의 잔여 병력 2백 명 정도가 포위망 탈출을 시도했는데 살아서 탈출에 성공한 병사는 부상병 16명을 포함한 41명. 그중에는 대대장에게 “우린 다 죽게 되냐”고 천진하게 물었던 데니스 일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시 하늘이 묺어져도 살 사람은 사는 모양이다.
부상병들과 함께 포로를 자청했던 대대장 카니 중령은 포로 생활 중에도 병사들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용기를 북돋았다. 군의관과 의무 부사관은 중공군 부상자들도 함께 치료해 주면서 중공군 의료품을 얻어 영국군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군종신부 역시 포로 상황에서도 미사 집전을 빼먹지 않았다. 압록강 부근에 있었다는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는1,060 명의 영국군 포로가 있었는데 그 중 82명이 죽고 나머지가 휴전후인1953년 7월 석방되었다. 카니 대대장은 대령으로 은퇴후 고향인 클렌헴에에 돌아가서 속세를 버린듯 조용히 살다가1986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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